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나는 1985년 11월부터 1988년 2월까지 근무한 맹호부대 용사였다. 나는 가평군 현리에 주둔해 있던 맹호부대,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1여단 202대대 1중대 3소대 1분대에 배속되었다가 1년 후에 중대본부 병기담당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중대본부에서 나의 임무는 평시에는 병기를 지급 관리하고 탄약을 수불하는 일을 담당했고, 작전에 나가서는 P-77 무전기를 메고 중대망 통신을 담당했었다. 27개월 군생활 동안, 혹한기 3회와 혹서기 2회의 200km 행군을 했고, 한미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에도 참가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대대급 훈련으로 고된 날들을 보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3개 기계화보병여단과 포병여단을 보유한 막강한 부대다. 전차 1개 대대와 장갑차 2개 대대로 구성된 3개 전투여단에 155mm, 8인치 자주포로 무장한 포병여단을 거느린 현재 기준으로도 최강의 부대였다. 1980년대 기계화보병사단은 수도사단과 20사단이 전부였다.

전두환과 신군부가 군사반란을 일으켰을 때, 박준병의 20사단이 서울로 진입할 것을 우려한 육본에서는 수도사단으로 하여금 양수리에서 20사단의 서울진입을 차단하도록 명령했었다. 그러나 반란에 가담했던 1여단장 정만길 대령은 여단을 무장하여 출동대기한 상태로 사단장 손길남 소장을 겁박해 사단의 출동을 지휘할 수 없게 하였다. 정만길의 활약으로 수도사단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20사단은 서울로 진입할 수 있었다.

반란에 가담해 하극상을 자행한 정만길은 4년 만에 3성 장군으로 진급해 제5군단장이 되었다. 그는 부임 후 예하 사단 시찰길에 1여단에 들러 회포를 풀기도 했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는 줄곧 수도사단의 지휘권을 놓지 않았다. 군 복무 기간 동안, 사단장은 육사 17기 김진영과 육사 18기 조남풍이었다. 하나회 반란 가담자들이 대물려 수도사단의 지휘봉을 잡았다.

1987년 들어 혹한기 200km 행군 이후로 별다른 영외 훈련 없이 지냈다. 2월 들어서면서 충정훈련이 시작되었다. 충정훈련은 시위와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훈련을 말한다. 전투경찰과 비슷한데 곤봉은 있지만 방패는 없었다. 공격 일변도의 진압훈련이었다. 평소에 일상으로 하던 모든 군사훈련을 폐하고 오로지 곤봉을 휘두르고 장갑차에서 발사되는 최류탄 폭발음을 신호로 병사들은 돌격을 반복했다.

그해 4월, 우리 중대가 여단장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중대장의 수신호에 맞춰 결집-확산하고 돌격하고 장갑차와 병진하는 것을 시범 보였다. 병력의 시범이 끝나고 화력시범을 했는데 화염방사기도 있었다. 화염방사기는 월남전 때 쓰던 것으로 대대 병기창고에 보관했던 치장물자였다. 두 개의 휘발유 탱크 중앙에 있는 공기탱크에 콤프레셔로 압축공기를 주입해 그 압력으로 화염을 분사하게 된다. 20~30m에 달하는 화염이 발사되는 것을 지켜보던 참혹했던 기억이 떨쳐지질 않는다.

전두환의 4.13 호헌담화 이후 대학, 노동계, 종교계와 학계의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목소리가 한참일 때, 상부에서 작전계획이 하달되었다. 1여단의 임무는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캠퍼스 배치도는 물론 건물 세부 설계도가 청사진으로 제공되었다. 배치도의 위에서부터 1중대가 사범대학을, 2중대가 인문대학을 담당하는 방식으로 구역을 나누어 1여단이 관악캠퍼스 전체를 장악하고 학생들을 체포, 해산하는 것이 임무였다.

작전 내용은 간부들만 알도록 했고 도상으로 훈련했다. 나는 작전서기병 고참을 도와 청사진을 보고 출입구와 계단, 비상구 등을 A4 크기로 요약해 옮겨 그렸다. 국회나 방송국 등의 주요 시설과 중심가는 수방사와 공수여단이 맡고 대학들을 야전부대가 담당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36년 전, 1987년 6월 29일, 노태우가 ‘호헌철폐-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선언하는 그 순간에도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제압하고 화염을 쏘는 훈련을 시키고 있었음을 나는 참회하며 증언한다. 1987년 6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조금만 덜 뜨거웠어도, 아마 나는 장갑차를 타고 대학에 진입해 곤봉을 휘두르고 화염방사기로 위협한 나를 참회하고 있을 것이다.

이산면 배해마을에서 나고 자란 의로운 군인, 고 정병주 전 특수전사령관님의 원통한 죽음에 애도의 꽃을 바친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로운 투표용지는 그해 6월에 뿌려진 피로 젖어 있다. 녹슨 철조망을 타고 넘는 장미꽃이 붉은 까닭을 그대, 왜 모르는 체하나요.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