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남 (작가)

지난 5월 11일 대법원은 ‘제사는 장남’이라는 판례를 깨고 ‘연장자 우선’을 판결했다. 이 판결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망인의 장남이나 장손자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는 2008년 대법원 전원 합의체 판결을 15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적자와 서자의 구분 없이 ‘장남’이 제사 주재자가 된다는 기존의 대법원 판례가 변경된 배경으로는 “현대사회의 제사에서 부계혈족인 남성 중심의 가계 계승 의미는 상당 부분 퇴색하고, 망인에 대한 경애와 추모의 의미가 중요해지고 있으므로 남성 상속인이 여성 상속인보다 제사 주재자로 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어 “제사 주재자로 장남 또는 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우선하는 것이 보존해야 할 전통이라거나 헌법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볼 수도 없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대법원은 “종래의 제사 주재자 결정방법이 현재의 법질서와 조화되지 않는다면 기존 법규의 연장선상에서 현재의 법질서에 부합하도록 이를 조금씩 수정, 변경함으로써 명확하고 합당한 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밝혔다.

이런 변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적 정서가 깊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의 전통문화가 현실에 맞게 변화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영주는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은 지역이다. 이번 판례가 당장에 가정마다 어떤 변화를 가져 올지는 알 수 없으나, 서서히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체감으로 느낄 수 있다.

부모님의 제사를 합치거나 명절 제사로 대신하는 가정이 하나둘 늘어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조상이 관을 열고 나와 해괴망측하다 호통 칠 일이겠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 편견을 깨고 흑인 인어공주가 탄생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이 실감이 난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돌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우리나라 제사 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천지신명 등의 자연물에 드리는 제사이고 둘째는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다. 오늘날의 제사라고 하면 두 번째에 해당하는 조상제사를 의미한다.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는 또 다른 형태의 더 간소한 제례 문화로 변해갈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제사를 이어갈 수 없는 가정이 늘어날 확률이 높다.

자녀가 없는 가정도 있고 자녀가 있어도 종교적 이념적 차이나 그 외 또 다른 이유로 제사를 지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미국이나 유럽은 한·중·일처럼 조상제를 지내는 문화가 없다. 대신에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방식의 문화가 있다. 그런 만큼 제사는 우리의 고유한 문화임에 틀림 없다.

우리나라 제사는 망인에 대한 추모보다는 형식적인 면에 많이 치우쳐 있는 부분도 있다. 제사라는 의례를 통해서 조상의 은덕을 기리고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점이지만, 너무 격식을 따지고 무리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현대 정서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판례로 남녀 장벽이 무너지게 됐다. 법이 바뀌어 여자가 제사의 주재가 되어 시댁 제사와 친정 제사를 모두 챙겨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어찌 되었든 제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는 정성이 우선해야 한다.

아무리 백 살 인생이라지만 부모와 함께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사후에 치러지는 의례에 지극정성을 들이는 것보다는 부모님 살아계실 때 행복하게 해드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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