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법률 시장 새롭게 개척한 ‘1세대 변호사’, 그의 고향 사랑법

대표변호사로 재직중인 회사 앞에서
대표변호사로 재직중인 회사 앞에서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기업자문과 금융, 파산·회생, 지적재산권 분야 전문
과수원집 아들이지만 고교 때부터 스스로 생활비 조달

아르바이트 하며 사시 준비, 대학 졸업하던 해 합격
사람들 만날 때면 ‘선비의 고장’ 영주 자랑 ‘삼매경’

기자의 회사 생활 초창기, 회사 고문변호사는 대면이 힘들었다. 대체로 사무장 상담으로 대신했다.

사무장을 통해 받은 변호사 의견은 매우 짧은 글이고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기도 했다.

변호사들이 법률서비스를 받고자 하는 이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을 고객이라 대하는 인식은 당시 희박했다.

시대 상황에 맞게 고객을 직접 만나고 자신의 전문분야에 집중하며 만능 변호사의 이미지를 탈피한 전문 법률 시장을 개척한 1세대의 노력이 있었기에 한국의 법률 시장도 선진국형으로 바뀔 수 있었다. 소송업무 외 기업자문 및 전문가형 변호사 시장을 만든 변호사 1세대로 큰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가 김광훈 변호사이다.

김 변호사는 영주시내에서 순흥 방면으로 갈 때 지나가게 되는 장수고개에서 태어났다. 법무법인 세양의 대표변호사인 김 변호사와의 인터뷰는 바쁜 시간을 피해 밤에 이뤄졌다.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법률과 사업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지금도 치열해 보였다.

많이 바쁘시지요?

낮에는 사무로 분주하고 저녁은 고객을 만나고 행사 참석이 많다 보니 밤낮으로 분주해 보이기도 합니다.

보람을 주는 위촉장들
보람을 주는 위촉장들

큰 형님이신 김광윤 교수님이 동생(김변호사)을 대견해 하시더군요.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큰 형님의 영향이 컸습니다. 저희는 두 살 터울의 오형제로 남자 형제만입니다. 아들들 뒤치다꺼리로 어머니가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과수 농사를 하셨습니다. 당시 과수농사는 일일이 사람 손이 가는 방식이라 아들이 많으면 노력 동원에서 유리한 면이 있었습니다(함께 웃음). 적과하고, 약치고, 수확하고, 리어카에 싣고 영주과일상까지 갖다 주고...

지금은 과수원 울타리가 고라니나 멧돼지 방지용이지만 당시엔 사람들이 서리하지 못하도록 원두막에서 지켜야 했습니다. 학교 공부를 잘 한다고 집안 농사에 열외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시험이 있으면 이틀 정도 전에야 농삿일을 면제받았습니다. 콩밭 메고 고추밭 약 뿌리고 고추 따고... 농삿일 하던 옛 추억이 생각나는군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서울로 가셨나요?

고등학교를 외지로 간 것은 큰형님이 부모님께 말씀드려 가게 되었습니다. 대구고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고교 진학은 지금의 광역시도 단위와 유사한 지역 범위가 있어서 서울 진학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연합고사 1기입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과 제가 대구로 유학을 갔습니다.

재경 영주중 동기 회갑연
재경 영주중 동기 회갑연

외지, 특히 도시에 가면 사춘기 시절 한 눈을 팔 수도 있었겠는데요?

공부가 힘들었으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농삿일은 힘을 많이 쓰는 시대였는지라... 밭 일보다 공부가 편하고 쉬웠습니다. 다른 영주 출신들처럼 성실하기도 했고 다른 곳에 쓸 돈이 없었기도 하고요.

아.. 돈 부족도... 당시 집에서 과수 농사를 했으면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을 텐데요?

어렸지만 외지에 나가니 철이 좀 일찍 들었다고 할까요. 고생하시는 부모님이 맘에 걸렸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하다 제가 “부모님 전상서”라고 써서 부친 편지 여러 통 있더라고요. 부모님께 돈 보내달란 이야기를 하기가 참 죄송했습니다.

고2 때는 수학여행도 포기했습니다. 바로 위 형님이랑 같이 자취하며 둘이 초등학교 학생들 과외도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했습니다. 형이랑은 신기하게도 3년의 자취 생활 중 다툰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기숙사 생활을 하셨나요?

당시 큰 형님이 회계법인에 근무하시고 조카도 한 명 있었는데 형님댁에서 기거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한데 당시는 형님댁에 있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친구를 좋아해서 친구들을 집으로 오게도 했습니다. 친구들 빨래를 형수님께 맡기기도 하고.. 매일 도시락도 싸주셨습니다.

서울 법대를 다니면서 과외를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법대 동기 중 가장 과외를 많이 한 편이었습니다. 과외를 하면서 사법고시를 병행했고 졸업하던 해 사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과외를 많이 하다 보니 친구 학원비도 대주기도 했고요.

오형제 모임
오형제 모임

대학 시절 친구 학원비도 대주셨군요. 고등학교 다니면서 학원 수강을 하시지는 않았나요?

부모님께 학원비를 달라고는 하지 못했습니다. 고3 시절 영주에 있던 친구가 방학 기간에 대구에 와서 학원에 다녔는데 방학이 끝나고 학원등록증을 제게 넘겨 줘 친구 대신에 물리와 화학 학원을 다녔습니다. 그 덕 많이 보았습니다. 친구에게 감사하지요.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사법시험을 합격하시다니 대단합니다.
군필이시구요?

군법무관으로 37개월 복무했습니다. 군법무관 생활은 제게 큰 보람으로 남아있습니다.

제대 후 바로 변호사 생활을 하셨나요?

군 제대 후 진로 고민을 하였습니다. 1989년 당시 경험 없는 변호사가 홀로 독립해서 변호사 활동을 하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법무법인이란 조직이 당시 드문 직장이었습니다. 시대가 변해 기업 법무 중심의 변호사 활동이 필요해지던 시기였습니다.

법무법인에 적을 두고 기업자문과 금융, 파산·회생, 지적재산권 분야 전문으로 활동했습니다. 그 분야로 지금까지 쭉 일하고 있습니다. 법무법인 소속으로 5년, 개인변호사 5년을 활동하다 2006년 선배님과 법무법인 세양을 만들었습니다.

전문 변호사 세계를 개척하셨군요.

저희 때부터 전문 변호사 시대가 열렸다고 봅니다. 제가 변호사 등록을 하니 전국 변호사 숫자가 2천 명 정도였습니다. 지금 3만 명이 넘으니 그동안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호사 몇 명 없던 시절엔 고객도 사무장이 만나고 서면도 짧게 쓰는 관례가 있었지만 저는 처음부터 고객을 직접 대면으로 만나 충분히 상담하고, 증거를 열심히 찾고 서면도 구체적으로 자세히 썼습니다. 변호사 활동 초기에 익힌 이런 자세가 변호사 활동을 지속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UI / UX(user interface/user experience)적 접근을 하셨군요.

그런가요? 당시엔 그런 용어가 없었습니다. 젊었는지라 열심히 하는 걸로 경험을 대신하려 했습니다. 변호사 1세대로서 지금의 변호사 본연의 모습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생각하면 뿌듯하기도 합니다.

대학 재학 중 아르바이트를 하며 준비한 사법시험을 졸업하던 해 합격하고 전문 분야 변호사란 새로운 유형의 변호사 활동을 하시고... 그러면서 고향 관련 활동도 하시고.. 대단합니다.

재경 영주중 동창 모임을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재경영주중학교 전체 동문회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저희 동기들이 중학교 추첨 두 번째 기수였는데 학교 선생님들이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덕분에 영주중 출신 저희 동기들이 서울에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경민대 김엽래 교수, 남재철 전 기상청장, 남연호 내과원장, 강남구 의회 황영각 의원, 중소기업 임원인 금상호 동기는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멋진 선생님들을 만나셨군요. 그분들도 보람을 느끼셨겠습니다.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사회에 도움 되는 인간이 되도록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셨던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김창호 선생님,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배윤근 선생님을 평생 존경해 오고 있습니다.

중학교 졸업하고 외지로 유학 갔지만, 초등학교 중학교 어린 시절의 생활 기준이나 식성이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저는 영주가 고향인 것이 늘 자랑입니다. 주변 사람에게도 고향이 영주란 걸 말하고 선비의 고장인 걸 아느냐고 묻곤 합니다.

고향 사랑이 크군요.

고향 영주가 정말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바쁘게 생활하느라 늘 마음은 있었지만, 향우회 활동이나 기여가 많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향우회 활동 등 고향 관련 활동에 더 열심히 하려 합니다. 저를 낳아주고 지금의 제 기본을 만들어준 고향에 봉사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좋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선비들의 목표였다고 봅니다. 지금처럼 다양화된 시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겠지요?

네. 제 생각과 같습니다. 선비가 행동하지 않고 앉아서 책만 읽는다든지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 현대에 맞는 선비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 시대를 밝히는 선비상에 대한 논의가 많아져야 합니다. 저도 법조인 모임 같은 데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영주시 당국자 또는 영주시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릴 때 고향을 떠나 타지 생활하는지라 감히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어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평생 살고 친인척들이 살고 부모님 선영이 있는 고향 영주가 앞으로 더 소중한 지역으로 남길 바랍니다. 영주는 정신적 배경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보면서 자라 온 문화재, 소백산 산림, 오염되지 않은 하천 등 여러 장점이 있고 경쟁력이 있습니다.

다만, 훌륭한 정신적 문화적 배경이 있음에도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경제적 뒷받침 기반이 상대적으로 약해 안타깝습니다. 영주시와 시민들이 고민해 방향을 잡고, 출향인들이 뒷받침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고향 영주가 더 발전하길 바랍니다. 저도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습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김광훈 변호사의 프로필

- 영주서부초등학교, 영주중학교, 대구고등학교
- 서울대 법대, 사법연수원 15기 수료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문분야(금융) 법학연구과정 수료
- (현) 법무법인 세양 대표변호사
- (현) 국민권익위원회 자문위원, 산업통상자원부 제재처분재심의위원회 위원
- (현) 한국자산관리공사, 한국에너지공단, 전문건설공제조합, KDB 인프라, 한국소방시설협회, 한국감정평가사협회 등 고문변호사
- (전) 주식회사 세창 등 파산관재인
- (전) 중앙행정심판위원회 위원
- (전) 법제처 법령해석심의위원
- (전) 대한변호사회 이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사위원회위원장, 재산관리사업회위원장
- (수상) 서울지방변호사회 표창, 공로상, 백로상 / 국토부장관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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