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사람은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사람은 배우지 않고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자면 가르침이나 배움은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前提條件)이다. 가르침이나 배움이 왜 필요하냐 하면 사람은 이전 세대의 배움과 경험이 다음 세대로 유전적(遺傳的)인 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라틴어로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석판(石板)’이라는 뜻으로 타블라(tabula)는 태블릿(Tablet), 즉 판(板)이라는 단어의 어원이다. 교육학에서는 이 말을 가져와서 사람은 태어날 때 그 누구도 이전 세대의 학습이나 경험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아 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놓여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부모가 대단한 학자이거나 아무런 학식이 없는 사람이거나 관계없이 그 자식들은 모두 하얀 백지상태(白紙狀態)처럼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가르침을 받거나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을 받거나 배우는 데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후천적인 여러 가지 조건으로 인해 가르침이나 배움의 기회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차이가 생길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어떤 사람도 출발선상에는 똑같이 놓인다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전 세대의 학습과 경험이 유전된다면 너무나 불공평하거나 불공정한 상황이 전개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국민에게 가르침이나 배움의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로 교육할 의무와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정한 교육 수준까지는 국민 누구도 예외 없이 교육받아야 하는 의무교육 제도를 두고 있다.

교육의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시범교육(示範敎育)이다. 문자 그대로 ‘몸소 모범을 보이는 교육’이다. 이전세대(以前世代), 혹은 기성세대(旣成世代)가 후속세대(後續世代) 또는 차세대(次世代)에게 모범을 보이고 이를 따라 하게 하는 교육이 소위(所謂) ‘시범교육’이다. 그런데 말로 하는 교육에는 모범이 빠져 있고 몸으로 하는 교육에는 모범이 포함되어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언교(言敎)’와 ‘신교(身敎)’라고 할 수 있겠다.

논어(論語)의 「안연(顔淵)」편 19장 주해(註解)에 보면 자(字)가 언명(彦明)이고 사호(賜號)가 화정(和靖)인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윤돈(尹焞: 1071-1142)의 말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즉, “몸으로써 백성을 가르치는 자는 백성들이 따르고 말로써 가르치는 자는 백성들이 다툰다.(以身敎者는 從하고 以言敎者는 訟이라)라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몸으로 가르치는 것(以身敎)’은 위정자(爲政者)가 솔선수범(率先垂範)함을 이르고 ‘말로 가르치는 것(以言敎)’은 말만으로 가르침을 이른다고 할 수 있겠다. 문장의 용례로 보면 정치에 관한 일이라 하겠지만 이것을 그대로 교육에다 적용을 시킬 수 있겠다.

기성세대가 차세대를 교육할 때 말로만 가르치고 몸으로 가르치지 않으면 그 교육은 온전한 교육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으로 가르치지 않고 말로만 가르친다면 여기에는 가르치는 사람의 ‘모범성(模範性)’이 빠져 있으므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우리 속담에 ‘선생은 바담풍 해도 생도는 바람풍 하라는 격이다.’가 있다.

이 속담은 자기는 잘못된 행동을 서슴없이 하면서도 정작 남에게만 제대로 하라고 하는 모순적인 사람이나 상황을 일컬을 때 쓴다. 다시 말하면 가르치는 기성세대는 모범을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배우는 차세대에게는 제대로 하라고 가르치니 차세대들로서는 어떤 행동의 모범을 보지 않았으므로 무엇을 닮거나 배워야 하는지 그 대상이 없게 된다. 그러니 가르침을 따를 수가 없다. 아무리 말로 강조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한편 모범이 수반되지 않은, 말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모범이 동반되는 몸으로 하는 교육은 어쩌면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교육이 될 것이다. 만약 배우는 사람이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왜 따르지 않느냐고 다그칠 수가 있다. 그럴 때 배우는 사람은 한마디 변명도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가르치는 사람이 모범을 먼저 보였고 자기는 그렇게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가르치는 사람이 모범을 보이지 않고 말로만 가르쳤다면 당장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나보고만 하라고 한다.’라는 반론에 직면해도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기성세대의 시범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 더 언급하자면 우리가 쓰는 욕설(辱說) 가운데 가장 무섭고 아픈 욕이 무엇일까요?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의 신체를 넣어서 하는 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의외(意外)로 무섭고 아픈 욕은 정작 따로 있다고 하겠다. 그것은 바로 ‘본 데 없이 컸다.’이다. 얼른 들으면 이것이 무슨 욕이 되는가 싶겠으나 알고 보면 참으로 무서운 욕이다.

이것은 전통 시대에 생겨난 욕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 욕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사람이 되는 모범을 본 적이 없이 자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사람에게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욕보다 더 큰 욕이 어디 있겠는가? 이 욕에서 우리는 모범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된다. 모범은 바로 말로 하는 교육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교육의 핵심이다.

좀 더 비약(飛躍)해서 말하자면 현재 우리 사회에는 모범을 보이는 기성세대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몸으로 하는 가르침은 하지 않고 말로 하는 가르침만 하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가르치고 배우는 상황을 냉철하고도 면밀하게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누구나가 전문가인 듯이 교육의 문제를 말하지만 정작 핵심을 짚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몸으로 가르치지 않고 말로만 가르치기 때문에 교육이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은 선생님만이 아니라 기성세대 모두라고 하는 생각을 확고하게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사람들의 모든 생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인들이 어찌 보면 가장 큰 교육자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이 교육자란 사실을 자각할 때 아마도 현재와 같은 말과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정치인들은 정작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국민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유일한 집단인 듯하다. 그러니 정치인을 포함한 기성세대가 먼저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어쭙잖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저 모범만 보이면 된다. 이런 말이 있다.

‘자식은 부모의 등 뒤에서 큰다.’ 이 말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부모가 직접 보이는 모범적 행동을 보고 큰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교(身敎)’가 ‘언교(言敎)’보다 얼마나 중요한가를 대번에 알 수가 있다. 어찌 보면 ‘언교(言敎)’는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지만 ‘신교(身敎)’는 누구나가 할 수 있다. 누구나가 할 수 있는 교육이 가장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씁쓰레한 마음 가누기 어렵다. ‘선비의 고장’을 표방(標榜)하는 우리 영주에서부터 ‘언교(言敎)’가 아니라 ‘신교(身敎)’를 하자. 말이 아니라 그저 몸으로 보여주면 되는 쉬운 것을 두고 왜 하지 않을까? 굳이 길을 두고 메로 가랴?

아마도 가장 쉬운 것이 가장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쓴 약이라도 먹어야 하듯이. 이제 우리 모두 ‘언교(言敎)’보다 ‘신교(身敎)’를 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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