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모퉁이

-안도현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든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든 거지

 

-모퉁이 덕분에

숨겨진 저쪽을 추억하기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같은 삶을 추구하다가도, 잠깐의 어떤 곳에 나만의 비밀과 박동을 남겨 놓고 싶을 때가 있겠지요. 숨을 수밖에, 숨길 수밖에 없는… 모퉁이도 그런 곳 중 하나가 됩니다. 모퉁이를 만나고 그것을 도는 일은, 내려놓았던 여유와 다독임을 갖는 것이기도 하구요.

모퉁이를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보다 ‘내가 나를 배반할 꿈’부터 말이에요. 아직은 어정쩡한 내가, 그런 나를 배반해 완전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꿈. 혹은, 휘어지거나 꺾일 줄 모르던 내가 나를 배반해 조금은 부드럽고 완만해지는 내가 되는 꿈을요.

이 시는, 묶어 놓기만 했던 삶을 풀어보게 합니다. “자전거 핸들을” “멋지게 꺾”듯이, 잦아들었던 심장도 어쩐지 팔딱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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