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복 (소백산백년숲 사회적협동조합 이사)
『신라 최항은 자가 석남이다. 애첩이 있었는데 부모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다 수개월이 지나 최항이 갑자기 죽었다. 8일이 지나 밤중에 항이 애첩을 찾아갔다. 첩은 그가 죽은 줄 모르고 반겨 맞았다. 항은 머리에 꽂고 있던 석남가지를 나누어 첩의 머리에 꽂으며 말하길, ‘부모가 그대와 동거하는 것을 허락했노라’ 하였다. 마침내 첩과 함께 돌아가 그 집에 이르러 항이 담을 넘어 들어가더니 새벽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집 안 사람이 나와 보고 온 이유를 물었다. 첩이 모두 말하자 집 안 사람이 말하기를 “항은 죽은 지 8일이 되어서 오늘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무슨 기이한 일을 말하느냐?” 하니 첩이 말하기를 “남편이 나에게 석남 가지를 나누어 꽂아 주었는데, 이것으로 증거 삼을 수 있다” 하였다. 이에 관을 열어보니 시체가 머리에 석남 가지를 꽂고 있었고 옷이 이슬에 젖어있었으며, 신발도 이미 신고 있었다. 첩이 그가 죽은 것을 알고 통곡하며 자결하려 하니 항이 곧 다시 살아나 스무 해 동안 함께 살다 죽었다.』
수삽석남首揷石枏 설화다. 신라수이전에 실린 이야기를 임진왜란 전 대구 부사를 역임한 권문해가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을 지을 때 수록한 설화다. 대동운부군옥은 1798년(정조 22) 7세손 권진락이 정범조(丁範祖)의 서문을 받고, 1812년(순조 12)에 간행을 시작하여 1836년(헌종 2)에 완간된 책이다.
서정주는 이 설화를 읽고 “소연가”를 지었다. 노회찬은 어린 시절에 소연가에 곡을 붙였고 직접 부른 음원을 남겼다. 대동운부군옥 판각은 예천군 용문면 중림리 초간종택 백승각에 보관해 오다 최근에 문화재청으로 이관되었다.
나는 수삽석남首揷石枏 설화를 읽으며 두 가지 의문을 품었다. 하나는 석남은 어떤 식물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국의 세익스피어는 어떻게 수삽석람 설화와 똑같은 모티브의 작품을 썼을까 하는 것이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의문을 풀어볼 참이다.
석남을 두고 어떤 이는 매화 가지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만병초였을 것이라고도 한다. 나 또한 만병초일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옛것을 읽으며 지금의 상황에 꿰맞추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석남엽은 석남의 붉은 잎을 말린 약재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으며 수입된 것이었다. 고려 의종 때 기록에 울릉도에 파견된 관리가 보고하기를 “시호(柴胡)·호본(蒿本)·석남초(石南草)가 많이 자라지만 바위가 많아 백성들이 살기에는 좋지 않다.”고 했다. 이 石南草가 어떤 식물인지는 알 수 없다. 국내에서 만병초잎이 석남엽石南葉으로 유통되고 있는데, 만병초와 석남은 상록인 것과 잎이 두꺼운 것 말고는 모양이나 크기, 계통이 확연히 다르다.
석남은 홍가시나무다. 대만, 일본, 태국 등 아열대지방에서 주로 자라는 외래종이다. 홍가시나무(Photinia glabra (Thunb.) Franch. & Sav.)는 장미과에 딸린 상록 소교목으로 다 자라면 키가 5~8m에 달한다. 요즈음 국내에서도 정원수나 울타리용으로 식재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식물이다. 만병초는 진달래과 철쭉 종류로 고산식물이다. 소백산이나 태백산에서 채집한 사례가 있으나 남한에서는 흔한 식물이 아니다.
설화를 자세히 읽어보면 계절은 한여름이다. 항의 수의가 이슬에 젖어있었으니 꽃피는 봄이 아니다. “伉首揷石枏, 枝分與妾曰(항수삽석남 지분여첩왈)”이라 한 구절에는 꽃이 아닌 ‘가지를 나누어 꽂았다고’ 적고 있다. 이 설화에 의하면 신라 최항은 홍가시나무가 흔히 자라는 고장에 살았거나, 지은이가 홍가시나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는 스스로 묻는다. 신라는 어떤 나라인가? 어디에 있었던 나라인가?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 천문기록에 담긴 한국사의 수수께끼』 라는 책을 2002년에 발간했다. 그는 삼국사기와 중국사서의 일식 기록을 시뮬레이션해서 기록이 실측한 것인지와 관측지가 어디였는지를 분석했다. 분석결과 삼국사기 일식 기록은 2건을 제외하고 모두 실측 가능한 것이었고, 백제의 일식 관측지가 화북지방, 신라는 초기 양자강, 후기 경상도로 분석되었다. 이에 박창범 교수는 여러 차례 검증 과정을 거쳐 역사학계에 질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20년이 지나도록 그 누구도 답을 하지 않았다. 首揷石枏설화 또한 역사학계가 답을 해야 하는 물음이다.
내가 배운 국사 교과서에는 앞뒤가 안 맞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백제 근초고왕이 말갈에 대비해 군마를 정비했다고 한 기록이나 초기 신라가 낭랑과 전쟁을 했다는 사서 기록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죽은 최항이 살아 돌아와 말하고 있다. “나의 살던 신라는 붉은 石枏(석남)이 자라는 따듯한 고장이었다고”. 나는 묻는다. 강단의 역사학계는 언제까지 조선총독부 촉탁들의 악독한 ‘구라’를 외우고만 있을 것이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