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마을 만죽재 주손, 그가 귀향을 결행한 이유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만죽재 앞마당에서
만죽재 앞마당에서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12대 할아버지가 개척한 마을, 당연히 돌아와야 한다 생각
무섬마을 중심으로 선비들의 흔적, 대를 이어 모으고 보존
선조가 물려준 그대로, 고택이 불편해도 개조 생각 없어

세계유일의 모래강 내성천이 휘감고 돌아가는 육지 속 섬마을 무섬마을, 옛 정취가 간직된 고택들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 박수(朴檖) 공에 의해 병자호란 후 운둔군자의 삶을 추구하고자 개척된 지 약 350년이 됐다.

외나무다리로만 통해 자칫 오지로 오해될 수 있지만, 독립운동 성지, 전통가옥 마을, 시인 조지훈 처가, 박사·교수가 많이 나은 마을, 부유한 반촌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있다.

마을을 처음 연 박수(朴檖) 공의 12대손 박천세씨가 귀향했다.

삶의 터전을 자신의 조상이 태어났고 자신이 태어난 무섬마을로 귀향해 고택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무섬마을 이야기를 해 준다. 고향에 돌아오고 싶다면서도 그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애향인들 속에 그의 귀향이 반갑다. 무섬마을을 찾아 그를 만났다. 아직 서울에 일이 있어 서울 나들이 뒤의 만남이다.

서울에 일이 있어 매주 가신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 표현에서 이제 무섬마을에 정착한 걸 알겠군요. 서울이 사는 곳이라 생각하셨다면 ‘무섬에 자주 온다’라는 표현을 하셨을 것 같군요.

네 그렇습니다(함께 웃음).

고조부의 항일운동 격문집 -중
고조부의 항일운동 격문집 -중

정자에 올라 보니 아래와는 다른 모습이 보이네요?

여기서 보면 서향인데 남산이라 합니다. 도연명의 ‘유연견남산’ 싯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학가산이 바로 앞에 보이고 외나무다리가 한눈에 들어오고 펼쳐진 모래사장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석양의 광경은 장관입니다. 해가 남산에 걸리면 참 볼만합니다. 물이 지금 별로 없지만, 많이 흘러가면 참 좋습니다. 깨끗한 물이 흘러가고...

무섬마을을 둘러 흐르는 물이 늘 깨끗해야 하겠군요. 수질이 어떤가요?

좀 걱정이기도 합니다. 봉화에서 시작하는 물과 풍기의 서천과 금계천, 순흥의 죽계천 물이 모이는데, 상류 수질 관리가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수자원공사와 협의했습니다. 영주 일대 각 꼭짓점의 폐수 데이터를 분기별로 모아 행정기관과 수질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담 중 무섬마을 1박 문의 전화가 온다) 고택스테이를 하고 싶다는 분들입니다.

조부(박찬상) 독립운동 자료
조부(박찬상) 독립운동 자료

영주에 와서 묵고 싶다는 전화였군요. 참 반가운 전화였네요.

영주 인구가 줄고 있습니다. 시골 인구 증가가 참 어렵다고 합니다. 인구감소를 멈추게 하는 방책도 그 효과가 미지수라 합니다. 그렇다면 묵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도록 해야 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을 맞이하는 게 기쁩니다. 그런 분들이 많아지도록 저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은퇴 후의 생활 방편이 되니 저도 좋습니다.

고택스테이 하는 분들은 주로 어떤 분들인지요?

저희 집에 오는 분들 99프로 이상이 점잖은 분들입니다. 고전문화를 즐기는 분들입니다. 유희를 찾는 분들은 고택에 잘 안 옵니다. 제가 낯가림을 하는 편이지만 점잖은 손님들이라 저도 안심입니다. 그분들은 고택의 불편함을 불편이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요즘 이삼십대 젊은 분들의 선호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전통문화를 즐기려는 젊은이들입니다. 우리 집이 알려지다 보니 쿠팡이나 야놀자가 가입을 권유하는데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백프로 전화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전화로라도 손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만죽재 예약을 받습니다.

태어나신 집이 만죽재인데 만죽재에서 기거를 하시는지요?

봄, 여름, 가을 기거합니다만 손님이 머물고 싶어하시면 양보합니다. 영주 시내에 집을 하나 마련했습니다. 추위가 아내의 건강에 좋지 않은 것도 있고 겨울은 아무래도 만죽재에서 지내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옛 모습을 망가뜨리는 개조를 하기도 싫습니다. 만죽재는 무섬에 오는 분들을 위해 늘 깨끗하게 해 놓고 있습니다.

무섬마을 초가 이엉 작업 시
무섬마을 초가 이엉 작업 시

고택 소개를 하시면?

12대조부터 살았는데 당호가 원래는 섬계당이었습니다. 왕휘지의 시에 나오는 지명과 같습니다. 섬계당으로 불리다가 섬계 호를 쓴 6대조부터 섬계초당으로 위아래 현판을 걸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퇴락하니 고조부가 증수를 시작하여 증조부까지 이어졌습니다. 증조부께서 고조부 호를 따서 만죽재라 하셨습니다.

입향 당시 문서가 있는데 당시 노비가 40명이고 땅은 여기 말고도 6필지가 있었습니다. 주위에 행랑채가 많았습니다. 그 집들은 지금 연간 텃도지로 수만원 또는 깨 한 되 정도를 받습니다. 무섬에는 집을 파는 분위기는 없는 듯합니다.

이제 영주 계시는 시간이 많은데 영주에서 활동을 많이 하셔야 합니다.

저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무섬에 들어오면 밖에 잘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물 밖에 나가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심리상태... 무섬에 들어오면 밖에 나가는 게 원행(遠行: 멀리 떠나는)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옛날 어른들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물이 마을을 두르고 있으니 그랬으리라 봅니다만 지금은 차량으로 금방 이동할 수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무섬마을의 전통을 잇고자 하시는 마음이 느껴집니다.

저희 집에 오래된 책과 문서가 많습니다. 조상들의 흔적이 오롯이 베인 문서들을 모와 왔습니다. 저도 어른들의 그런 모습을 본받아 폐기하지 않고 모으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 시기의 격문도 있고, 선비들의 모임 관련 기록도 많습니다. 남아있는 문서가 수천 점입니다. 섬계회 문서도 많은데 매화를 소재로 한 시가 많더군요. 고택은 단순한 건축물이라기 보다 정신문화의 상징입니다. 앞으로도 잘 보존되어야 합니다.

만죽재를 어른들이 잘 보존하셨고 앞으로도 잘 보존하시겠다는 뜻이군요?

네. 저도 힘껏 노력하려 합니다. 현재 무송헌 김담선생의 종택이 무섬에 있는데 원래 삼판서고택이 종택이었습니다. 영주 삼판서고택 복원되었고 삼판서고택에 깃든 정신문화의 계승 차원에서 종택으로 활용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자주 듭니다.

오랫동안 영주의 자랑으로 내려온 금계 황준량 선생과 소고 박승임선생의 종택도 복원되어야 합니다. 안동은 최근 월천 조목선생 종택을 복원했다 합니다. 고택은 사람이 살아야 보전됩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유지보수비도 많아집니다.

감사한 말씀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아지겠지요?

리더십을 발휘할 몇 분이 같이 노력하시면 됩니다. 저는 외가가 안동 내압 백인재이고 진외가가 안동 후조당입니다. 어른들 간 내왕이 많고 사랑방에서 이야기도 많이 나누셨는데 외가 진외가 어른들의 활동을 보면 리더십 가진 몇 분의 노력이 큰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영주의 선비는 그분들의 자랑 근거를 시대적 가치에 맞도록 세상에 자꾸 알려야 합니다. 영주는 문화적 리더십을 키워야 합니다. 영주는 우리나라 더 나아가 세계에 내놓을 문화가 있습니다. 그 문화를 바탕으로 현대 그리고 미래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리더십을 키워야 합니다.

서울에 일이 있는지요? 아직 서울과 무섬마을을 오가신다고 하셨는데...

서울 반포에 있는 교회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장로로서 일이 많아 그 일도 뜻깊어 재임 동안 열심히 할 계획입니다. 그 뒤에는 영주에서만 활동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떻게 귀향 정착을 생각하셨나요?

무섬에 당연히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입향조로부터 13대째 한집에 살고 제 삶을 여기서 시작했고 마무리도 여기서 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구체적 목표는 없었습니다. 저는 만죽재 안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구조 그대로입니다. 문지방 하나 안 고치고 있습니다.

무섬마을에서 증조부모님 조모님과 같이 살다 증조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아버지가 직장생활 하시던 서울의 학교에 갔습니다. 입학 전날 서울로 갔습니다. 갓 쓰고 도포 입은 증조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입학식에 참석했습니다. 답십리초등학교, 서울유한중학교, 남강고등학교, 대학은 미국 메릴랜드에서 공부하고 총신대에서 선교학으로 석사.. 사회생활은 사업을 했습니다. 현재 교회장로인데 사업은 악착까지 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습니다.

유가에서 태어나 신학을 하셨군요. 어른들과 마찰이 없었나요?

아버님이 반대하셨습니다. 저는 목사직 생각은 없었습니다. 신학 계기는 중학교 때 다닌 교회와 연관이 있습니다. 저는 삶이 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 증조부님이나 아버님은 ‘선비집에 태어났다고 선비라 생각하지 말라.’ ‘선비 행동을 하지 못하면 선비라 할 수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삶이 신학이라 생각하는 것도 어른들의 이런 말씀과 연관이 깊습니다. 조부는 와세다대학 출신인데 공직에 계시다 사변 때 난리에 돌아가셨습니다. 증조부님은 그 아픔을 가슴에 품고 사셨습니다. 조모님이 시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출향인들이 영주에 돌아오는 모습을 많이 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렸을 적부터 공부를 외지에서 했습니다만 한 달에 한 번은 무섬에 왔습니다. 학교 다닐 땐 방학을 보냈구요. 고향 내려와 정착하려 하면서 출향인들의 귀향 또는 외지인들의 귀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가 의료 부분입니다. 위급 시엔 상당히 리스크가 크단 걸 느꼈습니다. 두 번째 친구입니다.

삶에서 동반자적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친구라는 인프라가 적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붓글씨를 배우고 싶은데 앞으로 서실을 통해 사귈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합니다. 온라인으로 서예지도를 해 주시겠다고 하는데 그분들에게 부담될까 하지 않고 있습니다. 혼자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있습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만죽재 박천세 주손 프로필

- 무섬마을 출생(무섬마을을 연 박수(朴檖) 공의 12대 주손)
- 답십리초등학교, 서울유한중학교, 남강고등학교
-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신학 총신대 선교학 석사
- 개인사업
- 무섬마을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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