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오늘 <논리적사고와책읽기> 강의 시간에 공자(孔子)의 이야기가 나왔다. 학생들에게 공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좀 생뚱맞게 공자야말로 대표적인 흙수저라고 하니 상당수의 학생들이 의아(疑訝)해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는 세계 4대 성인(聖人)의 한 사람으로 거의 신격화(神格化)된 인물인데 그런 공자를 흙수저라고 하니 놀랄 밖에는.
물론 공자의 신분을 따져보면 당연히 흙수저라고 하기는 어렵다. 공자는 주나라에 망한 은나라의 조그만 제후국인 송나라의 후예였으니 흙수저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당시는 계급사회였고 평민이나 노비도 많아서 그들에 비하면 당연히 흙수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같은 계급 내에서는 흙수저에 가깝다고 하겠다.
게다가 공자의 아버지 공흘(孔紇)은 자가 숙량(叔梁)으로 일찍이 추읍(鄹邑)의 대부(大夫)를 지낸 노나라의 무사(武士)였다. 공자가 태어났을 때에는 거의 70에 가까운 나이였고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顔徵在)는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였다. 이처럼 공자가 처한 집안 환경의 측면에서 보자면 공자는 거의 오늘날 말하는 흙수저에 가깝다고 하겠다.
공자의 부친 공흘은 시씨(施氏)와의 사이에서 9명의 딸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자 또 첩을 들여서 공자보다 형이기 때문에 맹피(孟皮)라고 하는 공피(孔皮)를 낳았는데 이번에는 족질(足疾)이 있어서 정상적인 생할을 하기가 많이 불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공자 부친은 무리를 해서라도 아들을 하나 더 낳으려고 한 결과 공자가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자의 탄생에는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공흘은 공자가 3살 정도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오늘날 방산(防山)을 마주한 양공림(梁公林)이라 부르는 곳에 장례를 치르고 공자 모친은 어린 공자를 업고 곡부(曲阜)로 이주(移住)하게 된다.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도 별로 없는 낯선 곳에서 젊은 어머니가 홀로 어린 공자를 키우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오늘날과 같은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어린 홀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는 것이 결코 용이(容易)한 일이 아닌데 하물며 지금부터 2,500여년도 더 이전에는 어떠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논어(論語)』의 「자한(子罕)」편에 보면 공자가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바로 “내가 어린 시절에 미천하여 비루(鄙陋)한 일에 능함이 많았다.(吾少也.賤故.多能鄙事.)”라고 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공자는 솔직하게 자신이 어린 시절 미천했던 까닭에 비루한 일에서 잘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형편이 어려우면 누구나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오히려 비루한 일에 능했던 것을 숨기지 않고 제자들에게 떳떳이 말하는 용기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공자를 공자답게 만드는 하나의 시례(示例)라고 하겠다.
그러나 공자는 어려운 환경을 조금도 탓하지 아니하고 배움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논어』의 첫장인 「학이(學而)」편 첫머리에 ‘배우고 때로 이것을 익히다.(學而時習之)’라고 하였다. 다른 어떤 글자보다 ‘학(學)’이란 글자가 제일 먼저 나온다. ‘학’은 공자를 대표하며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공자의 트레이드 마크다.
또 후생들은 공자를 ‘태어나면서 이것을 안다.(生而知之)’라고 높여서 말하고 있지만 정작 공자 본인은 「술이(述而)」편에서 “나는 나면서부터 도(道)를 안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그것을 구하는 사람이다.(子曰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말하였다. 옛날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하려고 한다면 배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가능하지가 않다. 따라서 이러한 언급에서 배움을 좋아하는 공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 배움에 대한 공자의 열망(熱望)을 알 수 있는 구절 하나를 더 예거(例擧)해 본다. 그것은 바로 『논어』의 「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오는 “내 일찍이 종일토록 밥을 먹지 않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서 생각해 보니 유익함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못하였다.(吾嘗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無益.不如學也.)”라고 하는 공자의 말이 그것이다. 공자도 한때는 배움을 통하지 않고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여러모로 모색해 본 사실을 이 언급을 통해 알 수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며 골똘하게 생각해서 뭔가를 이루려고 한 일이다. 실제로 공자는 그렇게 해보았지만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고는 다시는 생각해서 무엇을 이루려고 하지 않고 곧바로 배움이라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이처럼 공자는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럼 왜 이렇게 공자의 이야기를 장황(張皇)하게 기술했느냐 하면 바로 오늘날 젊은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자신을 흙수저라고 성급하게 규정짓고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공자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알려주어 공자처럼 자신의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고 결국에는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에서 공자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이다. 사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알고 보면 공자도 오늘날의 젊은이 못지 않은 흙수저라고 하였다.
섣불리 일반화하여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그래도 공자보다 상황이나 환경이 못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예외적인 젊은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자는 그토록 열악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서 오로지 배움을 좋아하는 하나의 무기를 들고 무섭게 노력하여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이라고 하겠다. 물론 공자가 배운 내용과 오늘날 젊은이들이 배우는 내용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배움이라는 수단만은 다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와 같이 배움을 좋아하고 배움을 위한 무서운 노력을 투입하면 많은 이들이 공자만큼은 아니더라도 현재의 상황보다는 훨씬 더 나은 상황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는 의지, 다시 말하면 스스로를 분발시키려는 자기 동기 유발의 의지와 용기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스스로 일어서려고 하지 않으면 어떤 시도도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조급하거나 어설프게 이 문제에 접근해서도 안된다. 치밀한 계획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가지게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疏通)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들의 눈높이와 그들의 처지로 다가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진정성을 보여줄 때 젊은이들도 마음을 열고 소통에 응하게 될 것이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세대간에 융화(融和)를 이룬다면 어려운 문제도 너끈히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흙수저를 벗어나 좀 더 나은 상태로 이동하려는 노력을 함께 기울인다면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처지를 비관하고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경우에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공자보다 여건이나 환경이 결코 못하지 않다는 냉철한 상황 인식을 한 바탕 위에서 공자보다 더 열정적으로 배움에 나서고 배우려는 노력을 경주해나간다면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분명코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용기를 내어 도전하려는 의지와 실천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주어진 환경을 탓하지 말고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떨쳐 일어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