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일하며 51세에 박사학위까지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어린이집 원장, 대학 강의, 학생 코칭 상담까지
갤러리(인테리어) 오픈으로 새 사업 도전

어려운 가정 형편을 딛고 치열한 삶을 살아온 애향인이 많다.

치열한 삶이라 하면 힘든 삶을 떠올리기 쉬우나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고 쉴 틈 없이 지내는 일상 속에서 마련한 시간을 가족과 해외여행도 하고 때로는 오롯이 자신만의 여유 기회로 갖는 애향인도 있다.

애향인 김재량씨가 그런 사람이다. 김재량씨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다. 원장님, 선생님, 교수님, 사장님, 대표님, 박사님 등이 그의 현재 호칭이다.


교수는 대학의 사회복지 강의로, 원장은 어린이집 원장으로, 선생은 초중고 진로교육, 성교육 등 강의 및 상담으로, 사장과 대표는 가구 인테리어 갤러리 경영으로, 박사는 사회복지 학위로 생긴 호칭이다. 50대 후반으로 지금도 치열하게 그러면서 사회에 부담이 되지 않고 도움이 되려면 이제 80대 90대도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고 김재량씨는 말한다.

김재량 박사는 스스로 사회적 성공인이 아니라고 말하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였다. 친구들이 흉을 볼지 모른다고. 또 잘 나지 않았는데 인터뷰를 하는 게 부끄럽다고 했다.

애향인 대담 이 사회적으로 큰 성공인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에 인터뷰에 응하면서도 조심스러워했다. 김재량 박사는 재경영주시향우회에서 만났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재경금계중학교동문회에서 이미 본 사이였다. 그에게 언제 귀향하냐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하였다.

김치나눔봉사
김치나눔봉사

언제 귀향하시나요?

나이 들면 고향으로 가려고 땅도 사 놓았습니다. 마침 안동에 적합한 땅이 있어 샀고 고향에서 출퇴근도 가능하다 보았습니다. 요즘 잘못 정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가서 좀 있어 보니 무언가 저와 잘 맞지 않았습니다. 또 제가 살고 싶은 풍기와 거리가 좀 멀다 싶습니다.

출향인들은 고향 인근 지역도 고향처럼 생각하니 안동에 땅을 마련하셨군요. 이왕이면 그 땅을 처분하고 영주에 대토를 마련하시는 게 어떤가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규모가 있어서 그런지 팔기가 좀 힘듭니다. 가능하면 제가 태어나 초중고를 보낸 풍기에 살았으면 합니다.

고향에 자주 오시지요?

그럼요. 현재 어머니가 혼자 사십니다. 아버지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현재 경기도 분당의 재활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어머니가 혼자 사시니 이것저것 어머니가 사시는데 필요한 걸 준비해 뵈러 가곤 합니다. 갔다가는 고향 사는 친구들을 보지도 못할 때가 대부분입니다. 어머니가 외로움을 많이 타십니다.

성격이 강하신 분이라 남과의 어울림도 힘들어 하시는 듯 했습니다. 가끔은 모른 척하거나 져주기도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곤 합니다. 제가 맏딸이다 보니 어머니가 제게는 아들에게 못했던 말도 막 하십니다. ‘만만한 게 딸’인가 봅니다. 혼자 계시다 딸이 오니 속에 있는 미주알고주알 다 하시는 거지요.

대학 강의 중(아동교육)
대학 강의 중(아동교육)

어머니를 뵈면 부딪치기도 하겠는데요?

그럼요.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의견충돌도 생기고(함께 웃음). 혼자 계시니 짠합니다. 그래도 돌아가시면 제 속을 긁던 어머니 말도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

제 어머니 돌아가시니 어머니 잔소리도 그리워지더군요. 요즘은 어떤 일이 주된 일인가요?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계신 것 같은데.

최근 갤러리를 열었습니다. 커텐, 블라인드, 가구 등 인테리어 갤러리입니다.

전공과 관련이 있나요?

인테리어 관련 전문 지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남편 후배가 하던 사업인데 그분이 건강문제로 낙향하면서 남편이 제게 갤러리를 맡으라고 강권했습니다.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면서 살라더니 왜 이런 일을 하라 하냐며 항의도 했습니다(함께 웃음). 처음에는 손님 오시면 테이블 밑으로 숨고 싶었습니다.

정말 첫 손님이 오셨을 때 테이블 밑에 숨었습니다(함께 웃음). 블라인드에, 커텐에, 가구에... 아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20일 정도 멍하게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내 자리가 아니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도망가고 싶은 제 마음과는 달리 손님이 자꾸 오시더군요. 내가 잘 아리라 생각하고 이것저것 묻는데 주인이란 사람이 제 몫을 못 하니 그분들에게 죄스러웠습니다.

스님 찾아가 하소연했더니 ‘잘 할 겁니다.’ 라시더군요. 아는 게 없다고 말씀드리니 ‘잘 할 수 있어. 해 봐.’ 라시더군요. 그동안 멍하게 있기만 했는데 정신이 번쩍 들어 부랴부랴 사업자등록증 내고 관련 책자 보며 공부했습니다. 제조사에 전화해서 모르는 것을 문의했습니다. 한 달을 공부했습니다. 이제야 좀 아는 것 같은데 가구 지식은 아직 부족합니다. 가구에 대해서는 손님에게 잘 모른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니 오히려 신뢰하시더군요.

사회교육원 강의 중
사회교육원 강의 중

언제 갤러리 매장을 개업하셨나요?

지난해 인수했습니다. 지난해 11월과 12월, 금년 1월 정말 손님이 없었습니다. 하긴 손님이 오셔도 숨으려 했으니(함께 웃음). 개업식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주변에서 해야 한다고 해서 했습니다. 바로 어제(3.26.일) 개업식을 했습니다. 늦은 개업식이었습니다. 개업식 중에도 두 팀이 구매를 하셨습니다.

인테리어 갤러리 관련 전공을 하지 않으셨군요. 그렇다면 전공은?

제 전공은 경북전문대에서 행정학,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에서 아동심리학과 사회복지학, 평생교육학 복수 전공, 숙명여대 평생교육원에서 보육교사 과정과 미술과정, 보수 교육은 수원대와 강남대에서 했고 한양대 평생교육원에서 방과후지도자 과정을 했습니다.

석사는 국민대 행정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으로, 박사는 온석대학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으로 했습니다. 박사 학위는 51세에 취득했습니다.

갤러리를 본격 운영하시게 되었으니 다른 일은 이제 하지 않으시나요? 그동안 일과 공부를 병행하셨는데 어떤 일이었나요?

이제 어린이집은 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집 자리에 요양보호사교육원을 할 계획을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갤러리를... 강의는 지금도 합니다. 주로 온라인 강의로 합니다. 이동 시간을 다른 일에 활용할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온라인 강의는 가족여행을 해도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서울문화예술대. 원격보육교사교육원. 선린대 평생교육원. 한국보육교사교육원. 배움사이버평생교육원 등에서 학생을 모두 200명 정도 관리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사이버교육은 갤러리에 있으면서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지난해 까진 오프라인 과정 강의로 여러 지역을 다녔습니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실습현장 지도하는 걸로 하루는 부산, 하루는 대구, 하루는 호남... 이런 식으로 강의하며 그 지역에서 가고 싶은 곳을 여행하곤 했습니다. 일회성 강의로는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 초중고 성교육과 진로교육. 아이들 코칭, 어린이 상담, 법원 가정폭력 상담을 많이 했습니다. 관변단체에서 위원장 직책을 포함, 봉사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분야 공부와 일을 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인테리어 공부도 속성으로 한 달을 집중하시고(함께 웃음).

공부는 전부 다 일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일하기 위한 공부도 있고 공부하다 보니 관련 일하기도 했습니다. 세 시간 잘 때가 많았습니다. 많이 자는 게 다섯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다섯 시간을 넘게 자면 허리가 아프곤 합니다. 그러고 보니 결혼 초창기 14년 동안 이사도 14번이나 했습니다.

대단합니다. 치열한 삶을 사셨는데 원래 성격이 그렇게 적극적인가요? 일만 하느라 여행도 못 가신 것 아닌가요?

원래 성격이 외향적이지도 않았고 일만 한 것도 아닙니다.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엔 친구들이 제가 있는 줄도 모를 정도였을 겁니다. 친구들과 함께 떠들거나 같이 뭉쳐 떡볶이 먹으러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말이 없고 말을 들어주는 성격이니 친구들이 고민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상담 일은 그때부터 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함께 웃음). 제가 5남매 맏이다 보니 동생들도 거두고 동물도 거두어야 해서 수업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어머니가 밖으로 다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성격은 사회생활 하며 많이 바꾸었습니다. 성격이 바뀌었다기 보다 살기 위해 바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자주 말씀하신 게 ‘서울은 코베어 가는 곳이다.’였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 말씀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습니다. 해외여행도 가족여행으로 여러 번 다녔습니다. 해외여행을 하려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가 귀는 뚫리는데 입은 열리지 않는군요(함께 웃음). 이젠 아이들이 영어를 잘해서 해외여행도 편합니다.

자녀들은 영어를 잘 하는군요.

네. 유학을 했거든요. 우리 애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길 바랐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글로벌 세상에 눈을 뜨는 걸 바랐습니다. 애들에게 놀란 건 유학 가서 집 독채를 얻어 친구들에게 세를 준 일이었습니다. 친구들에게 세를 주고 주 한 번 한식 요리를 만들어 주더군요. 친구들 상담도 해주고요. 놀랍고 뿌듯했습니다.

재경영주시향우회 회의 때 뵈었지요? 재경향우회 활동만 하시나요?

향우회 활동은 약 30년 정도 한 것 같습니다. 재경 금계중학교동문회 활동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총무 일을 보기도 했습니다. 조용히 뒤에서 챙기는 일이 대부분이라 금중 동문회 모임에 가셨어도 기억 못하실 겁니다. 고향 사람들 중 가장 많이 만나는 향우는 경북전문대 동문들입니다.

제가 경북전문대 재학 중 취업했는데 그 회사에 경북전문대 동문들이 많았습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고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만났습니다. 풍우회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학교 동문 및 지역 향우들이 사이좋게 건강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량 박사의 프로필

- 풍기북부초등학교, 금계중학교, 풍기고등학교(현 경북항공고등학교)
- 경북전문대학교 행정과,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아동심리학과, 사회복지학, 평생교육학 복수 전공,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보육교사 과정과 미술과정
- 한양대 평생교육원 방과후지도자 과정
- 국민대 행정대학원 사회복지학(석사)
- 온석대학원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박사)

- (현) 박준형갤러리 대표(031-356-0289)
- (현) 사회복지 관련 대학 강의

- (수상) 안산시장상(봉사활동), 우수교수상(평생교육원 한국보육교사교육원)
- (저서) 석박사 학위 논문, 인간행동과사회(공저)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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