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섬마을엔 원래 제방도 없고 담장도 없었다”

조은구택 전경(예전엔 마을에 담이 없었다)
조은구택 전경(예전엔 마을에 담이 없었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조은구택 8남매 중 장남, 대구대서 교수로 재직
옛 모습이 더 좋은 경관, 원래대로 복원됐으면

독립운동의 성지 ‘아도서숙’의 정신 널리 알리고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관 “세계적 명소 만들어야”

영주시 무섬마을은 마을 자체가 문화재라 할 수 있다. 그중에 김위진 가옥이 있다.

‘조은구택’이라 쓰인 현판이 한옥의 이름을 알려준다. 이 집은 김한철 가옥이라고도 한다.

바로 이 집 주인이 김한철 대구대 명예교수(이하 김 교수로 칭함)이다. 김위진 가옥이란 명칭은 김 교수 부친 이름에서 나왔다.

김 교수는 사람들을 만나 자신을 소개할 때 무섬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그만큼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집이 있는 무섬마을에 대한 애정이 깊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도 무섬마을 중심이었다. 다른 대화를 하다가도 무섬마을로 이야기가 돌아갔다. 무섬마을에 대해 미처 알지 못하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서예에 일가견을 보이고 있다.

괴산군 만동묘에서
괴산군 만동묘에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부탁합니다. 세계 유일의 모래 강 내성천이 작은 산을 휘감아 돌고 배산임수로 오래된 기와집과 초가집이 만드는 경관과 외나무다리가 관광객의 이목을 끕니다.

어린 시절 보았던 고택 중 복원 안 된 집들도 있습니다. 퇴락하고 무너진 후 사라진 고택이 제가 알기로는 다섯 집입니다. 집안 형님네들 집도 없어졌고 진사댁 집도 없어졌습니다. 그 집들도 다 있었더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섯 채 중 하나는 영주시에서 복원했고 현재 식당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문화재청에 집들의 복원을 장기계획에라도 넣어달라 건의를 했고 긍정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언제쯤 될런지...(김교수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사랑채에 걸린 현판 조은구택
사랑채에 걸린 현판 조은구택

경북 문화재자료 제360호인 조은구택 주인이신데 집의 이름이 생긴 이야기가 있겠지요?

‘조은구택’ 현판을 보셨군요. ‘조은’은 고조부의 호입니다. 고종황제 시절인 1893년(계사년)에 지었습니다. 당시 고조부가 살아계셨는데 고조부를 위해 증조부께서 집을 지었다 합니다. 관광자료에는 ‘김위진 가옥’으로 많이 알려졌습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님의 이름을 딴 표현입니다. 제 이름을 따서 ‘김한철 가옥’이라고도 합니다. 집 형태가 ‘ㅁ’자 모양의 건물에 헌함이 달려 있습니다. 조선 후기 사대부 집의 전형적 모습이라 해서 문화재로 선정됐습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게 있는데 무섬마을에 담이 없었습니다. 어렸을 때 마을 곳곳에 쏘다녔는데 담이 없었습니다. 요즘에 너무 내것 네것을 가려서 그런지 무섬마을에도 담이 생겼습니다. 무섬마을에 담이 없는 것은 마을 위치와도 관련 있습니다. 담이 차지하는 공간도 아까울 수 있고 장마철 비가 많이 내리면 냇가 쪽은 담이 있어도 무너질 수밖에 없지요. 옛날엔 제방도 없었습니다.

홍수가 나면 물가 집은 비상이 걸렸지요. 앞마당까지 강물이 찰랑거리기도 했답니다. 제방이 이제는 물과 마을을 갈라놓는 장애물입니다. 마을에서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을을 휘감는 게 내성천이 아니라 제방이 되어버렸습니다. 제방을 낮추어 마을과 내성천이 마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무섬마을을 찾는 관광객에게도 옛 모습이 더 좋은 경관이라 봅니다. 무섬마을에 없던 담이 생긴 것도 제방을 만들고 나서입니다.

전시회 출품작
전시회 출품작

영주에는 자주 들리시는지요?

어머니가 계십니다. 어머니는 인동장씨로 이웃 마을인 평은 금가이(금광)에서 오셨습니다. 연세가 96세입니다. 이 연세라고 하면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이 연상되지만 저희 어머니는 정정하신 편으로 손수 식사도 준비하십니다. 물론 우리 남매들이 반찬을 해 드리기는 하지만 손수 차리십니다.

경로당에 가서 친구들과 노시는 게 좋다고 합니다. 대구에서 모시고 살려고 입으실 옷 등 작은 이삿짐을 꾸려서 갔는데 바로 다음 날 공기도 좋지 않고 친구도 없고 건물만 보여 답답하다고 무섬마을에 다시 데려다 달라고 정색을 하시는 바람에... 덕분에 무섬마을 집에 한 달에도 몇 번씩 들립니다.

하룻밤 어머니랑 같이 자려고 하면 대구로 돌아가라고 성화이시지요. 아마 당신의 생활 리듬이 깨지는 게 싫으신가 봅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그 많은 자식들을 낳고 키우셨는지..(함께 웃음)

어머니가 가까운 마을에서 시집오셨군요. 부모님은 자녀를 얼마나 두셨는지요?

외가가 가까워서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친정 가셔서 저를 낳으셔서 저는 외가 태생입니다. 저희는 모두 8남매입니다. 맨 위가 현재 연세 80인 누님이 계시고 제가 장남이고 줄줄이 남동생입니다. 누님과 막내 동생의 나이 차는 20년 정도 납니다. 당시 자식이 많을수록 일손이 많아진다고 해서 부러움을 샀지요. 당시 다자녀 시대였지만 8남매 자녀들 둔 집들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전부 출향인이 되었습니다.

농사짓기에는 농토가 부족하고 다들 생업을 찾아 도시로 나갈 수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둘째 남동생이 인근 지역 안동에 살면서 어머니를 가장 많이 찾아뵙습니다. 그 동생에게 고맙지요. 어머니께서 요즘 기억력도 떨어지고.. 걱정이 많습니다.

부친은 어떤 일을 하셨는지요? 평소 강조하던 말씀이 있는지요?

일제 때 일본 유학을 하셨습니다. 당시 집에 땅이 많았습니다. 영주에서는 안정뜰(영주시 안정면 현 간이비행장 인근)에 넓은 땅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잘 살았지요. 안동에서 공직자 생활을 하셨습니다. 후에 인천제철에 재직하시면서 임원으로 계셨습니다. 인천제철 이사로 계실 때 조부께서 고향으로 돌아오라 하셔서 귀향하셨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시 토지개혁으로 농토 대부분은 소작인에게 불하됐습니다. 불하받은 이가 원주인에게 장기에 걸쳐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이었지요. 인플레가 심하던 시절인지라 시간이 지날수록 원주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적게 됩니다. 나중에는 ‘종이쪼가리’라 할 정도였지요. 아버님은 저희에게 늘 말씀하시는 게 ‘인성’이었습니다. 이기적이지 말고 남을 배려하란 말씀을 하셨습니다. 외유내강을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재산이란 건 들어오면 언제든 나가게 되는데 그 재산이 곱게 나가야지 사람에게 재앙이 되도록 하면 안 된다 하셨습니다. 재산이 나갈 때 사람을 해치는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저희에게 특별한 훈계는 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그저 자식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의 말씀이셨습니다. 자식들과의 대화는 주로 일상적인 소통이 주였습니다.

현 이산서원 김백 운영위원장도 무섬마을이 고향이지요? 김백 위원장 말씀에 따르면 그분의 부친께서 저의 외조부 성암선생(김세영) 제자로 성암선생이 풍기로 이거하니 따라 이사를 했을 정도라더군요. 성암선생은 무섬마을에서 전통의 유교를 가르치셨고 무섬마을에서는 아도서숙처럼 신학문 공부 기풍도 있었습니다.

선비들의 가르침은 늘 실제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이니 유교의 가르침과 신학문 공부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토목건축 교수 출신인 저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제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김백 위원장님 부친인 수촌어른은 대단한 한학자였습니다. 전 연세대 교수로 유명 한학자인 연민 이가원 박사도 수촌어른께 배웠다고 합니다. 아도서숙은 젊은이들이 주민 교육도 하고 반일사상도 키우는 곳이었습니다.

반일사상을 고취했다 해서 일제에 의해 여러 분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무섬마을은 아도서숙이 있어 독립운동의 주요 장소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던 분 다섯 분은 독립유공자로 추서가 되었는데 같이 투옥되어 고생을 했으면서도 독립유공자 추서를 받지 못한 분들이 있어 안타깝습니다.

대구대 건축공학 교수로 계시다가 정년 후 명예교수로 계신데 전공을 건축으로 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건축학이 아니라 토목공학을 전공했습니다. 대입 첫 입시 실패 후 재수를 하려는데 아버님이 친척을 통해 후기 대학에 원서를 넣고 전공도 제 의사는 묻지 않고 토목공학과로 정하셨습니다.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으니 계속 공부를 했고 석사를 마친 후에는 목포공전 재직 교수이던 지인에게서 목포공전에 응시하란 연락이 와서 목포공전에서 약 2년 봉직했습니다. 교수로 있으면서 박사과정을 다녔습니다.

목포에서 서울까지 다니려니 교통편이 불편해 당시 참 힘들었습니다. 박사 후엔 목포공전 학과장으로 계시던 분이 한사대(후에 대구대로 개칭) 교수 공채 응시를 권하셔서 대구대 교수가 되었습니다. 당시 대구대는 건축공학 교수를 찾았는데 제가 토목공학 박사이긴 하나 주 전공이 ‘구조’인지라 건축공학에 맞단 평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선공감 벼슬을 했습니다.

선공감은 토목공사, 수리, 자재 조달 등의 업무를 담당하던 자리입니다. 할아버지는 당시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습니다. 제 전공을 제가 선택한 건 아니지만 할아버지가 하셨던 일과 통하기도 합니다(함께 웃음).

집안에 내려오는 유적이 많지 않나요?

웬걸요. 거의 없습니다. 6.25 남북전쟁 시기 무섬마을에 소개령이 내렸습니다. 당시 무섬마을 형편이 좋은지라 학가산에 있던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소개령 후 당시 안동사범학교 인근의 가옥으로 집안 유물을 옮겼습니다. 현 시청 인근으로 당시 북문뚝으로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전쟁이 나자 안동사범학교는 인민군의 진주지가 되어버려 유엔군의 폭격을 받고 그 와중에 저희 집도 폭격을 맞아 유물도 그때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갖고 계시던 경복궁 중건 설계도도 소실되었습니다. 참 아깝습니다. 정작 무섬마을은 소개령이 있었으나 경관이 좋은 곳인지라 폭격을 면했다고 합니다.

영주시청이나 영주시민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방 뚝을 낮추어 마을에서 내성천이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옛 모습을 아는 분이 “무섬은 제방 때문에 베려버렸구나”라고 하셨답니다. 모래가 너무 많이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자갈만 남은 무섬마을에 누가 오겠습니까. 모래가 보충되어야 합니다. 아도서숙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영주댐 수질이 너무 안 좋습니다. 영주댐의 기능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수질 개선을 위해 축사 분뇨 정화 대책이 시급합니다. 시 단위에서 힘들다면 도에서 또 나라 차원에서 추진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섬마을은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독특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갖고 있습니다. 영주에 세계적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김한철 교수의 프로필

- 문수초등학교
- 안동중학교, 안동고등학교
- 단국대 토목공학(구조) 박사
- (현) 대구대학교 명예교수
- (전) 대구대학교 건축공학 교수, 목포공전 교수
- (훈) 옥조근정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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