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시인)
검정 비닐봉지
-정용국
과자든 쓰레기든 모두 다 받아준다
흉한 건 안 보이게 체면은 구기지 않게
시치미 뚝 떼어 놓고 아무렇지 않은 채
천 원에 두 개 주는 갓 쪄낸 옥수수도
열 켤레 단돈 만 원 땡처리 양말까지
부도 난 공장 근심도 푸근하게 담는다
홀아비 술안주 감 왕순대 한 접시도
자투리 남은 음식 갈무리도 쌈빡하게
말없이 거두어 주는 저 알뜰한 둥근 품
시장을 한 바퀴 돌면 봉지만 대여섯 개
햇볕을 받아 이고 잘 여문 포도알처럼
허기를 눙치고 앉아 또 하루를 달랜다
-비록, 팽(烹)을 당할지라도
한때는 가볍고 편리한 쓸모로 소중하게 자리했던 것이 이제는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검정 비닐봉지처럼요. 비닐봉지는 제 의지대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면서 쓰임새에 따라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깨어보니 환경파괴의 선두주자가 돼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디 비닐봉지뿐일까요?
비닐봉지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한데 이 작품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숱한 경험을 넘은 사고의 깊이를 오롯이 숨기고 있습니다. “흉한 건 안 보이게 체면은 구기지 않게” 잠깐의 주인을 위해서도 경전 같은 마음을 다합니다.
바야흐로 ‘강약약강’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기 드물게 제 주변에도 ‘강강약약’인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검정 비닐봉지처럼 재질은 얇고 질기게 보여도 “알뜰한 둥근 품”을 가진 사람들요. 그래서 살맛이 나기도 합니다.
제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그래서 쳐다보고만 있어도 아픈 비닐봉지들이 아득하게 밀리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