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흔적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속에 녹아 있다”

새내마을에 있는 서재 안신별구재
새내마을에 있는 서재 안신별구재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현 소장 도서 4만권, 7만 도서 소장이 목표이자 꿈
고문서, 전시보다는 사람 손길 닿는 환경 조성해야

주1회 이상 새내마을 고향집 들러 부친께 문안 인사
효와 우애 실천이 바로 ‘선비정신’...실천의 중요성 강조

‘k-열풍’이 세계 속에 한국을 알리고 있다. 세계 속에 한국을 심는다는 평도 있다. ‘k-열풍’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우리 전통을 잇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고문헌연구소 서수용 소장도 우리 조상들의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데 한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서 소장의 근무처는 여러 곳이다.

서울 인사동 소재 한국고문헌연구소, 안동 선비문화박물관, 안동 백암문화센터 5층에 새로 마련한 사무실이다. 고향인 단산면 새내 마을에도 그의 서재가 있다.

서 소장과의 인터뷰는 안동 백암문화센터 5층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아직 사무실 이름도 없다. 크리스마스 날 이사를 했다고 한다. 커다란 방에 늘어선 책꽂이에 책들이 꽂혀 있고 아직 풀지 못한 책 상자가 사무실을 채우고 있다.

애향인 인터뷰에 응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출향인이라 하지 않고 애향인이라고 하니 좋습니다. 저는 마음으로는 재향입니다. 제게 17대 할아버지인 돈암선생(돈암 서한정)이 입향한 영주 새내마을에 저는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몸은 서울에, 안동에, 또 여러 곳에 있지만 말입니다(같이 웃음). 저는 구구초등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외지로 전학을 한 이래 외지에서 컸습니다만 제 집은 영주 새내마을(단산면 사천리)입니다. 굳이 출향인이라고 한다면 경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까요.

안동선비문화박물관 전시실에서
안동선비문화박물관 전시실에서

외가의 영향도 받으셨다구요?

외할배(權五德)가 안동권씨로 한학자셨습니다. 외할배의 친손 외손 중 한학을 하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외외가는 영주의 귀암종가입니다. 어머니가 새내마을로 시집을 오신 것도 귀암종손(황호규 현 귀암종손의 선친)의 주선이었습니다. 귀암선생(귀암 황효공)도 학덕에 비해 저평가된 분입니다. 어머니는 38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외지에서 다니셨군요.

여러 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고향의 구구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다니다 서울 전농동 전곡초등학교, 서울 종암동 숭례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 올라갈 때 아버님(서중일 전 순흥향교 전교, 현 숙모전 이사장)의 교사 부임지인 양평군 지평초등학교, 상주시 동성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버님의 전근지 인근인 함창중학교로 진학 후 외가 근처인 안동고에 진학했습니다. 안동대가 4년제로 국립대로 됨에 따라 한문학과 1회로 입학해 졸업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경일고 교사를 하다 성균관대 대학원에 진학하며 숭실고 교사를 했습니다.

군 제대 후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성균관대 박사과정으로 진학한 후 권정달의원 4급 보좌관, 송파구자원봉사센터장, 박약회 사무국장 15년 등 몇 직장과 직책을 거쳤지만 늘 지금 하는 일과 같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탁본도 문헌 수집의 주요 방법
탁본도 문헌 수집의 주요 방법

어린 시절부터 외지에서 자라셨다면 고향 마을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겠단 생각도 듭니다만?

웬걸요. 고향 마을은 어릴 때의 모습부터 지금의 모습까지 훤합니다. 아버님의 전근 지역을 따라 다니며 또 외가에서 살기도 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만 방학이면 의례 새내마을에서 지냈습니다. 성년이 되어서도 제집은 새내마을이고 지금도 매주 한 번 들러 아버님께 문안 올립니다. 고향은 예나 지금이나 저와 늘 함께입니다.

지금 계신 안동 백암문화센터 내 사무실은 언제 마련하셨나요?

어제 이사했습니다. 영주에 있던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이곳은 건물주께서 임차료를 받지 않으시고 문화센터 역할을 하라고 마련해주셨습니다. 영주에서는 월 60만원 상당의 임차료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백암문화센터이고 학교법인인 백암재단의 건물입니다.

아직 사무실의 이름이 없습니다만 생각해 둔 이름이 있습니다. ‘팽다선풍(烹茶仙風)’입니다. 나무에 새겨 놓은 게 있습니다. 이곳에 여러 사람이 모이고 사랑방처럼 활용되도록 할 계획입니다. 모여서 토론도 하고 강학도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허브라고 할까요.

책이 무척 많군요. 서울 인사동 한국고문헌연구소를 방문했을 때 책꽂이가 사람이 이동하기 힘들 정도로 차 있고 책꽂이에 진열하지 못한 책도 많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책을 옮겨오신 건가요? 소장하신 책이 얼마나 되나요?

이곳 책은 영주 사무실에 있던 책입니다. 이삿집센터 직원이 고생을 했습니다. 책이 보통 무거워야지요. 이곳의 책은 1만 권 정도입니다. 제 소장본은 서울, 영주 본가, 국학진흥원 기탁본 그리고 이곳 안동 사무실을 합쳐 약 4만권 정도입니다.

4만권이라... 옛 어른들의 꿈이 만권당에 들리는 것이었다고 하는데, 대단합니다.

저는 평생 7만권 정도의 책을 모으고 싶습니다. 방에 들어가면 ‘좌우도서(左右圖書)’ 인 환경을 좋아합니다. 옛 한옥을 보면 10칸 정도라면 4~5칸 방은 책이 찬 모습을 상상합니다. 실제 그런 집이 없어 아쉽습니다. 예전 우리나라에 만권당 또는 만권루가 있었습니다. 저는 젊을 때부터 만권에 대한 꿈이 있었나 봅니다.

대학 시절 대학 등록금 13만 원 시절에 도서 [한서(漢書)]를 2만5천 원에 샀을 정도였습니다. 요즘 책 많은 사람을 미련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새내마을에 있는 제 서재 이름은 ‘안신별구재(安身別求齋)’입니다. ‘안신별구재’는 19대조 돈암할배 싯구이며 현판 글씨는 퇴계선생 글씨 집자입니다.

옛 어른들의 흔적이 묻은 책 등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계십니다.

네. 옛 흔적은 없어진 흔적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속에 녹아있다고 봅니다. 요즘 옛 책을 모아 놓기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저는 지금 세대의 손길이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손길이 닿아 좀 망가지면 어떻습니까. 수장고 속에 잠겨있기만 하는 모습은 과거와 현재의 단절 상징으로 보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요즘에는 집에 보관하던 책들을 한국국학진흥원 등 전문 보관 기관에 많이 맡기는 것도 큰 추세로 보입니다만,

저는 그게 안타깝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게 더 좋다고 봅니다. 수 만권을 모으면 뭐 합니다. 그냥 모아 놓았다고 자랑하는데 자랑하기 위해 모으는 건가요? 세계유산에 등록을 추진하는 것도 세계유산 등록이 목적인가요? 그렇다면 그런 목적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합니다. 사람의 손길이 닿도록 하는 환경 조성을 해야 합니다.

도산서당 암서헌에서
도산서당 암서헌에서

사실 집에서 보관하면 분실을 당하는 시대의 기억 때문에 맡기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실제 언제나 접할 수 있는 박물관이나 도서관 등도 부족하니 말입니다.

영주에는 박물관, 도서관, 전시관이 안동에 비해서도 부족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곳의 하나인 안동선비문화박물관도 안동의 여러 박물관 중의 하나입니다. 영주는 소수박물관 정도이고 그나마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선비도서관, 영주시립도서관 등이 있지만 보관 기한이 지나면 다 버립니다. 귀중한 책인지 따지지 않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책을 기증하고 싶어도 5년 이내 출판된 도서만 받아준다는 곳이 대부분입니다.

영주시의 브랜드는 선비의 고장입니다. 서소장님은 영주 출신으로 옛 정신과 닿아있는 문헌 등을 연구하는 분인데 이와 관련하여 말씀을 해주시지요.

영주시는 지자체장이 바뀌어도 ‘선비의 고장’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매우 좋은 모습입니다. ‘선비의 고장’은 단순 홍보용으로만 써서는 안 됩니다. 소고선생(소고 박승임)과 금계선생(금계 황준량) 같은 분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금계종택과 소고종택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옛 종택을 복원해야 합니다. 안동은 온계종택과 월천종택을 국비와 시비로 복원했잖습니까. 각 문중 간의 형평성 때문에 그런 지원을 머뭇거린다면 선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하겠습니다. ‘탄신 5백주년 학술제’와 같은 행사를 하여도 그 행사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 됩니다. 물론 하지 않은 것보다는 하는 게 좋습니다만.

하긴 향교나 서원도 행사 중심의 의례로 끝나곤 한다는 비판도 있지요?

예전엔 서원에 출판부가 있었습니다. 문집 발간 등 책을 만들어 배포도 했습니다. 지금은 그런 활동하는 곳을 찾기 어렵습니다. 춘추로 향사나 지내고 평소에 문을 잠그는 게 일상인 게 안타깝습니다.

우리 전통을 연구하는 분으로 현시대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습니다만 선비정신을 실천했으면 합니다. 선비정신이 어려운 게 아니지 않습니까. 실천만 하면 됩니다. 어려운 것 말고도 집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실천만 하면 됩니다. 요즘 장례식장에 가면 상주들에게서도 슬픔을 보기 힘듭니다.

통상의 3일장, 그 짧은 기간에도 애도 보다는 형식적 행사 중심으로 장례가 흘러갑니다. 제가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교의 49제처럼 후딱 해치우는 장례를 넘어선 애도가 좋아 보이는 점도 있습니다.

최고의 즐거움을 무엇으로 삼고 계시는지요?

군자삼락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1락은 부모구존 형제무고이다. 그걸 제외하고는 제게 가장 즐거움을 주는 것은 독서최락(讀書最樂)이라 하겠습니다. 공자의 77대 종손 공덕성이 쓴 ‘讀書最樂’ 글씨도 있습니다. 안동시립도서관에 걸려있지요. 영주에도 최락당 당호의 고가가 있습니다.

해평윤씨 가문에는 공부방으로 사용되는 집이 ‘일락당(一樂堂)’입니다. 파평윤씨가의 종학당(宗學堂)도 그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윤대통령도 그런 공으로 났는지 모릅니다. ‘적선최락’을 내세우는 가문도 있습니다. 가문들이 이런 모습들을 유지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서수용 소장의 프로필

- 영주 단산 구구초등학교 외
- 함창중학교, 안동고등학교
- 안동대 한문학과 졸업, 성균관대 석사, 박사과정
- (현)한국고문헌연구소장
- (현)안동선비문화박물관 학예사
- (전)송파구자원봉사센터장
- (전)박약회 사무국장

- (저서) 『안동 하회마을을 찾아서』 『종가 기행』『영남 명가 순례』, 『영남의 가훈』『안동의 문화유산』 외

- (번역서) 『국역 대계선생문집』, 『국역 허주유고』 외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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