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영화에 관한 오래된 에피소드가 있다.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를 다룬 영화였다. 인디언에게 쫓기던 포장마차가 기차와 충돌하는 장면이 있었다. 변사가 실수로 이 둘이 충돌하기도 전에 부딪혔다고 설명했다. 관객들이 야유했다. 그 사이에 마차는 달려오던 기차와 부딪힌다. 변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봐라, 봐라. 내가 뭐라카드노 박는다고 했잖아.”
지금 생각하니 결과론적 해석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주말 이태원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일부는 이 사고를 두고 ‘예견된 참사’라고 썼다. 즉, 막을 수 있는 사고가 일어났다는 거다. 그건 나가도 너무 많이 나갔다. 팩트부터 말하자면 이태원 참사는 실제로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었다. 만일 누군가 그 사고를 미리 알았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행위나 다름없다. 어느 누구도 이러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핼러윈 축제에 대해 방심했던 정부(구청 포함)의 소극적 행태는 질책할 수 있다.
이유 없는 무덤이 없듯이 정부 측의 입장도 있다. 주관이 없는 행사에 대한 지자체의 사전 안전관리 심의나 통제 등의 의무는 없다. 또한 인파가 몰린다고 해서 아무 때나 압사(壓死)의 참사를 상상하기도 어렵다. 확률적으로도 그렇다.
많은 이들이 이번 참사에 경악했던 점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한편 논란이 된 용산구청장의 ‘축제가 아닌 현상’ 발언이나 행안부 장관의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주장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거나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다는 게 비극의 첫 번째 단초이다.
바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악수는 악수를 부른다고.
사전에 참사를 예견치 못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시민의 신고를 받고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얘기가 다르다. 압박 질식에 의한 골든타임은 겨우 4분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초를 다투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11번의 112 신고 중에 4번만 출동했고, 그 출동 역시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후 현장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방식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인력 부족의 이야기부터 지휘계통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판단이나 후속 조치 등 무엇하나 신속하거나 신통치 못했다. 그냥 안일했다고 퉁 쳐서 말하기엔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관행적으론 사소해 보이는 실수와 방심 그사이에 시민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고 생각하면 말이 안 나온다. 일각에서 인재(人災)가 피해를 키웠다며 스피커를 높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게 또 하나의 실착이다.
10.29일의 이태원은 어떤 점에서는 세월호의 데자뷰였다. 8년이나 지났는데 정부도 정치인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부터 정쟁의 논리와 수사까지 닮아있다.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오죽하면 이제 애도기간이 지났으니 남은 것은 정쟁의 시간이라는 말까지 나올까.
그러나 “그딴 건 너님들이나 하세요.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고작 사회적 안전망입니다. 부탁드립니다” 참사는 지금까지만 해도 차고 넘치므로.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정작 그럴 의지나 능력은 되는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