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은 내 운명, “가야금 활용 K-문화, 세상을 밝혔으면...”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초등시절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만난 가야금
국립국악중고 거쳐 서울대 음대 석박사과정 밟아

바쁜 현대 생활, 국악이 바로 그 잃어버린 물건
분실물로 취급되다시피 했던 국악, 다시 살렸으면

국악은 한국의 전통 음악이다.

한국의 뿌리가 음악으로 구현한 것이 국악이다.

어린 나이 때부터 국악의 보존 발전을 위한 삶을 사는 애향인이 있다. 바로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이주인 가야금 연주자이다.

이주인씨는 어렸을 적부터 국악에 재능을 보였다.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만난 가야금을 전공하며 10대 때 강남교육청의 가야금 공연부문 특기상, 전국 김해가야금경연대회 고등부 우수상을 받았으며 서울대(국악 전공) 재학 중에도 전국 김해가야금대회 일반부 입상, 서울대 발전기금장학생 선정, 국립청소년국악관현악단 단원, 국립관현악단 ‘청소년을 위한 협주곡의 밤을’ 협연했다.

이 씨는 국악 학자로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연주와 연구 저술을 함께하고 있다.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단원으로 재직 중이며 국립국악원의 활동으로 연주를 하고 전국 여러 곳에 시간을 쪼개어 연주 및 연주 심사 등 국악 확산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장상과 제10회 국립국악원 학술상 ‘우수학술상’을 수상했다. 지난 1일 무섬외나무다리 축제 개막식 첫머리로 가야금을 연주한 이주인 가야금연주자를 만났다.

첫 독주회 때 동은 이창규 선생과 협연
첫 독주회 때 동은 이창규 선생과 협연

고향을 떠나 고향을 빛내고 있는 분을 고향에서 만나니 더 좋습니다. 고향에는 자주 오시나요?

네. 시간 나는 대로 영주에 옵니다. 영주에서 오는 가야금 연주 의뢰는 제게 기쁨을 가득 줍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낼 수 있고 또 고향 이곳저곳 정든 추억이 살아납니다. 또 고향에서 만나는 모든 고향 사람들에게서 고향의 향기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더욱이 고향 행사는 고향발전을 위해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어 바쁘더라도 시간을 내어 고향 행사에 참석합니다.

영주에서 개최된 풍기인삼축제와 선비문화축제 때에도 시와 국악의 어울림 무대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2014년 10월, 영주시민회관에서 ‘가을밤, 명주실에 취하다’라는 주제로 전통음악과 창작음악을 아우르는 ‘이주인 가야금 독주회’ 공연도 했습니다.

제10회 국립국악원 학술상 우수학술상 수상
제10회 국립국악원 학술상 우수학술상 수상

많이 바쁘지요? 전국을 무대로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연주 기회가 가장 많습니다. 제가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단원이기도 하구요. 지방도 자주 갑니다. 점점 더 교통편이 좋아져 다행입니다. 오늘은 무섬마을의 ‘무섬외나무다리 축제’를 하고 내일은 전라도 광주에서 행사가 있습니다. 연휴가 되면 더 바쁩니다(웃음).

국악, 특히 가야금을 주전공으로 하고 계십니다. 집안이 음악 특히 국악과 인연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가야금에 빠져든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네. 친가와 외가 모두 음악인이 없습니다. 영주에 국악을 배우는 모임(국악동호인모임 한소리회 영주지부)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께서 단소를 배우셨습니다. 저도 어머니 따라 다니며 단소를 입에 대었습니다. 같이 배우는 어른들이 귀여워해 주시니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납니다.

단소를 배우는 중에 가야금을 지도하기 위해 주 1회 영주에 내려오시는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그분으로부터 가야금을 처음 배웠습니다. 그분은 동은 이창규 선생으로 이왕직 아악부 출신의 우리나라 정통 국악 스승이셨습니다. 동은 선생님이 저의 첫 독주회(2007.4.2. 한국문화의집) 때 연세가 아흔이었음에도 특별출연을 하셔서 제게 큰 영광이었습니다.

몇 년 후 동은 선생님의 임종 무렵 병원에 계셨을 때 종종 면회를 가서 선생님이랑 같이 연주했던 첫 독주회 음악을 이어폰으로 함께 들었었는데, 눈을 뜰 힘이 없는 상태에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자네 열심히 하게’입니다. 이것은 제 가슴에 살아 있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동은 이창규선생, 선화 김정자 교수를 모시고
동은 이창규선생, 선화 김정자 교수를 모시고

초등학교 때부터 국악의 큰 스승을 만나는 인연이 있었군요. 그래도 국악을 전공하는 쪽으로 진로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듯합니다. 중학교부터 국악학교(중학교 과정)에 진학, 국악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더군요.

제가 국악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을 깊게 했다기보다 할아버지 선생님(동은 이창규)의 말씀을 따랐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할아버지 선생님의 국악중학교 진학 권유가 있었던지라, 친구들이 모두 가는 일반 중학교가 아니었음에도 거부감 없이 응시했습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레슨을 많이 한 응시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합니다.

응시자의 부모들이 중학교 시험장인 학교 교문에 모여 하는 이야기가 대학 진학 이야기였다 합니다. 그런 응시자들 사이의 저는 너무 준비 안된 수험생이었습니다(웃음). 어머니는 응시생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가 합격하리란 생각을 접으셨다고 했습니다.

합격은 기쁜 일이었지만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지라 어린 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해서 슬프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쟁쟁한 응시자들 속에서 제가 합격하는 것을 보고 ‘이 길이 우리 딸의 운명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을 지내다 보니 저도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이 길을 가는 제 생활이 당연하다 여깁니다.

이주인 음반 사진
이주인 음반 사진

중학교 입학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셨군요. 매우 예민한 시기인데... 혹시 사춘기는 심하게 앓지 않으셨나요?

사춘기를 모르고 지냈습니다(웃음). 부모님이랑 떨어져서 혼자 지내다 보니 사춘기 반항이 자칫 ‘가정교육이 제대로 안 된 아이’로 보일까 두려웠달까.. 또, 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님께 그 잘못을 들키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라 기억합니다. 아마 어렸을 적부터 받은 교육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제 이름이 주인인데요, 주인 주(主)에 어질 인(仁), 아마도 인(仁)을 지키라는 어른들의 뜻이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봅니다. 아이고... 제 자랑이 심했습니다. 제가 잘못한 것이 없었다 하기도 그렇네요(웃음). 어쨌든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그 말씀대로 따르려고 기를 썼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야금을 운명이라고 여기시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도 가야금의 길을 가면서 어려운 고비도 있었겠지요?

어려운 일도 지나면 재미있는 추억일 수도 있는 걸요(웃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악중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가야금 연주가 동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방법과 달라 처음엔 힘들었습니다. 한편으론 연주법이 다양함을 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연주법은 대학 입학 후 김정자 교수님에게서 다시 접하였습니다. 김정자 교수님은 제가 교수님의 연주를 잘 따라 하니 어떻게 연습했냐고 하시더군요. 동은 선생님께 배웠다 하니 교수님이 ‘내 스승님이 그분이야.’라고 하셨습니다.

예전 인터뷰를 보니 독주회를 할 때, 자신을 분실물 보관소 직원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더군요.

국악은 우리 음악인데 잊히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바쁜 현대 생활을 하며 잃어버린 물건이 있어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태입니다. 우리 국악이 바로 그 잃어버린 물건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20대에 국악의 분야 중에 정악으로 첫 독주회를 열면서 제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제가 어리지만 사람, 시간,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 국악을 연주하는 것으로 국악을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가야금 연주자로서 또 국악 전공 학자로서 포부를 말씀해 주세요.

요즘 K-문화가 세계에 퍼지고 있습니다. 세상을 우리 문화로 밝히는 건 생각만 해도 뿌듯합니다. 저는 국악으로 특히 가야금을 활용하여 만드는 또 다른 K-문화가 세상을 밝혔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분실물로 취급되다시피 했던 국악이지만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 길을 찾고 있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닙니다만 저는 분명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주인 프로필

- 영주시 출생
- 영주동부초등학교 졸업
- 국립국악중학교, 국립국악고등학교
- 서울대학교 음악대학(가야금 전공) 학사 및 석사 졸업, 박사과정 수료.
- (현)국립국악원 창작악단
- (현)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원
- (현)정부시상지원 공연전통예술경연대회 평가위원
- (현)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가사 이수자
- (수상) 국립국악원장상 제10회 국립국악원 학술상 ‘우수학술상’ (2021.12.31.)

황재천 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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