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금파중학교 김호순 교감

가끔이지만 학창 시절을 생각하면 그리운 선생님들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숟가락을 잊어버리고 학교에 갔을 때 수저를 빌려주시던 이 선생님의 얼굴과 중학교 시절 늘 말썽꾸러기 제자를 감싸던 김 선생님의 얼굴, 고교 시절 언제나 묵묵히 지켜봐주시던 박 선생님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런 선생님의 기억을 되새기며 오늘은 60-70년대 영광여중고와 영주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시집이 있는 김포로 자리를 옮겨 30년 넘게 교직에 몸담고 있는 김호순(59)선생을 만나본다.

“지난 겨울 우연히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후배를 만났는데, “언니가 영광여고에 근무하던 시절 우리 동창들 사이에서는 정말 우상이었어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당시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교복을 입고 다니던 후배나 제자들의 눈에는 영주에서 서울의 사범대학까지 나와 여고의 미술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저의 모습이 여유롭고 대단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평범한 아줌마에 불과한데 말입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는 멋진 선생님이었던 그는 “그저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로 몇 번이고 자신의 몸을 낮추었다.

늘 제자들이 그리운 선생님

영주동 구역거리에서 자란 김호순 선생은 영주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남학생으로는 이두식이 그림을 잘 그렸다면 여학생으로는 김호순이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이미 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서울로 미술대회에 참석을 하기도 하고, 학내외 사생대회에서 입상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다.


영주여중과 영주여고를 거치면서 미술교사였던 박기태 선생의 영향을 받아 당시 영주여고 동창생과 선후배들은 미술대학에 진학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그도 박기태 선생의 지도로 미술대학 진학을 희망하게 된다. 하지만 실력이 출중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녀가 유별하다’는 생각을 가진 부친의 반대로 홍익대학이나 서울대학으로 진학을 하지 못하고, 당시 여자대학으로 유명했던 수도여자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 진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남자학교로 가는 것에 반대한 부친의 뜻에 따라 풍기중학교에 발령을 받고도 가지 못하고 영광여중고로 초임발령을 받아 가게 된다. 이곳에서 미술교사 일을 하다가 나중에 선친이 돌아가신 다음에야 남자학교인 영주중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후 결혼을 하고서는 잠시 영주에 더 있다가 시집에 있는 김포로 전근을 와서 현재까지 김포 인근에서 근무를 계속하고 있다.

김포가 고향인 남편은 서예에 조예가 깊은 편이며, 아들도 디자인을 전공하여 기업체에서 일을 하고 있어, 김호순 선생은 “기회가 되면 부부와 아들이 함께하는 전시회를 공동으로 한번 열고 싶다”고 한다. 큰 딸은 자신처럼 중학교 교사로 김포에서 근무하고 있고, 둘째 딸은 방송작가로 일을 하고 있어 바쁘다. 디자이너인 아들은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은 정신이 없는지 늘 귀가하는 것이 늦다. 현재 여의도에 살고 있는 김호순 선생의 일가족은, 장성한 두 딸의 출가문제로 고민에 쌓여있기도 하다.

영주여고 출신으로 영광여중고와 영주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  

아무튼 1960년대 초반 ‘여자는 초등학교만 나오면 된다’고 생각을 하던 부친의 뜻을 꺾고 대학에 진학을 한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장군의 손녀인 배우 김을동을 닮은 대장부 같은 외모에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서양화를 공부하고도 전업화가로서의 길을 가지 못하고 교사로 아내로 어머니로 바쁘게 살아왔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림을 전공하고도 “너무 바쁘고 시간이 없어 1년에 한두 작품을 하기가 힘이 든다”고 한다. “학교 동료들과 연구논문을 쓰거나 지역의 교사 동우회에서 주관하는 전시회에 가끔 참가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는 생활이 조금은 싫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여자의 길인 것 같다”는 말로 자조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아이들이 잘 자라 주어 모두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며, 대학원에 진학하여 졸업을 하기도 하고, 다니는 아들도 있어 대견하기만 하다. 국회의원 비서 일과 기업체 일을 하던 “남편이 정치에 뜻을 두어 여러 번 실패한 적이 있고, 자신도 몸이 좋지 않아서 몇 년 간 고생을 한 것을 빼면 가족 모두가 무탈하고 편안한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을 보면 평범한 가정주부와 다들 것이 없어 보였다.

“얼마 후면 교장으로 승진을 하게 될 것 같다”는 말과 아직도 “고향 영주에 가면 영광여고에 재직하던 시절인 1971년의 3학년 학생들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당시의 학생들 가운데 선후배들은 연락이 되어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담임을 했던 3학년 학생들은 아무도 연락이 되는 제자가 없어 수소문을 해 보지만 연락이 닿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정말 만나고 싶은 학생들이 많은데 말이다. “벌써 54살이 되었을 동생들 같은 제자들이 참 보고 싶다”고 한다.     

종가집 종부로 미술교사로 교감으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

“시골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싶어 서울로 대학을 와서 공부하던 시절의 추억과 다시 고향의 여중, 여고에서의 교편을 잡던 시절, 영주중학교로 옮겨가 근무하던 때를 생각하면 그리움이 깊어만 간다”고 한다. “요즘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 자주 고향에 갈 일이 없어지기는 했지만, 고향 인근에만 가도 왠지 그리움이 넘친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청송 가는 길에 지나던 영주의 시원한 바람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종가의 종부로 시집을 와서 며느리로 아내로 아이들의 엄마로 학교 교사로 살아온 30년 넘는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요즘은 그런 “세월과 자신을 되돌아보는 작품을 구상하고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김호순 선생을 만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번 기회에 그리운 선생님, 만나보고 싶었던 선생님에게 전화 연락을 한번쯤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특히 30년은 넘게 시간이 흘러갔지만 영광여중고의 많은 제자들은 추억을 더듬어가며 아름다운 인사말을 준비하여 김호순 선생의 이름을 한번 불러보자! 그리운 선생님 

(김호순 교감 연락처 011-495-3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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