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이제 곧 추석(秋夕)이라는 절사(節祀)가 다가온다. 추석은 정월 초하루인 설과 함께 우리 민족의 양대 명절(名節)이다. 특히 추석은 한여름 피땀을 흘려가며 짓고 가꾼 오곡백과(五穀百果)인 햇곡식과 햇과실을 조상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천신(薦新)의 성격이 강하다. 올해에는 추석이 너무 일찍 들어 천신이 어려워보인다. 그만큼 살아있는 사람들의 조상에 대한 마음이 조금은 무겁기도 하고 아쉬울 수 있겠다.
추석이 되면 거의 모든 가정에서 차례(茶禮)를 지낸다. 사실 차례는 정식 제사는 아니다. 그야말로 약식 제사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와서 이 제사에 대해 다소의 혼란을 겪고 있는 듯하다. 과연 제사를 계속해서 지내야 하는지, 아니면 좀 간소하게 줄여서 지내도 되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게 필자의 개인적인 소견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제례작악(制禮作樂)의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례작악이란 예법을 만들고 음악을 제작한다는 의미인데 주나라의 주공(周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제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기(禮記)⌋의 「제통(祭統)」에서는 제사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사란 못다 한 봉양을 행하고 못다 한 효도를 계속하는 것이다.(祭者.所以追養繼孝也.)”라고. 추양(追養)이란 말은 부모를 포함한 조상들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생시처럼 봉양을 계속하는 것이다. 또한 계효(繼孝)는 효도를 중단하지 않고 계속 이어간다는 것이다.
하여 생전에 효도를 극진히 한 사람은 효도를 계속할 수 있는 형식인 제사가 있어 좋아할 것이고, 반대로 평소 효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제사를 통해 그나마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계효의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그렇다고 추양과 계효를 살아계실 때처럼 매일매일 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너무 번거로우니까 시간을 정하고 기회를 제약해서 최소한의 봉양과 효도를 계속하는 마음을 나타내도록 한 것이 제사가 아닐까 한다.
「제의」에 보면 “제사를 자주 지내고자 아니한다. 왜냐하면 자주 지내게 되면 번거롭고 번거로우면 경건하지 않게 된다. 제사를 성글게 지내고자 아니한다. 왜냐하면 성글게 지내면 게으르게 되고 게으르면 곧 잊어버리게 된다.(祭不欲數.數則煩.煩則不敬.祭不欲疏.疏則怠.怠則忘.)”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일 년에도 수십 차례나 될 정도로 자주 지내게 되면 번잡해지고, 번잡하면 마음이 떠나서 경건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몇 년이나 몇십 년 만에 한 번 제사를 지낼 정도로 너무 소략하면 마음이 게을러지고 게을러지게 되면 그만 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중용의 어느 지점을 택하여 가장 합리적으로 예법을 만들어 놓은 것이 지금의 제사가 아닌가 한다. 물론 옛날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보다 제사를 많이 지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사는 농경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문화의 토대가 달라진 오늘날에는 옛날처럼 지낼 수 없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수긍(首肯)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사를 번잡하게 지내는 것이나 너무 소략하게 지내는 것 모두가 제사의 근본적인 의미에서는 벗어나 있다. 따라서 이제는 제사의 의미를 살리면서도 달라진 문화를 반영하여 제사를 지내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 같은 게 필요하다. 더 이상 국민들이 생각의 혼란과 주저함이 없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서 가닥을 잡아주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제사를 지낼 때 어느 정도의, 어떤 종류의 제수(祭需)를 장만해야 하는지, 또 제수 장만이 여성들만의 몫인지 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옛날 각종 예서(禮書)의 진설도(陳設圖)에 나와 있는 제수들을 종합하여 자기 형편에 맞게 자기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정도의 제수만 장만해도 크게 무리는 없어 보인다.
동암(東巖) 류장원(柳長源: 1724-1796)이 편찬한 ⌈상변통고(喪變通考)⌋의 「총론(總論)」에 보면 ‘무릇 제사는 사랑과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을 위주로 할 따름이다. 가난하면 집 안의 형편에 알맞게 하고, 질병이 있으면 힘을 헤아려서 행한다. 재물과 힘이 미치는 자는 각자 의식대로 함이 마땅하다.(凡祭.主於盡愛敬之誠而已.貧則稱家之有無.疾則量筋力而行之.財力可及者.自當如儀.)’라고 하였다. 역시 자기 형편에 맞게 해야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은 그에 맞게 더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수를 장만하는 문제도 굳이 남녀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옛날에는 여성들이 제수를 장만하면 남성들은 가져다 진설하고 또 몇몇 제수는 남성들이 실제로 만들기도 하였다. 조상에게 올리는 음식이니만치 정성을 들이는데 남녀로 구분을 두지 않았다는 뜻일 게다.
그런데 근래 일부 남성들이 제수 장만은 모두 여성에게 떠넘기고 자기들은 방안에 앉아 술상이나 봐오라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화투를 치는 등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것이 남자의 특권인 양 잘못된 행동들을 하고 있다. 하여 제수 장만에 적극 나서는 남성들까지도 도매금으로 욕을 먹고는 한다. 이런 문제 행동을 하는 남성들의 행위는 전적으로 아무 근거나 유래도 찾아볼 수 없는 몰상식(沒常識)한 짓으로 반드시 근절시켜야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추석부터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제사의 근본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고 모두가 화목하게 모여서 오순도순 제수도 함께 정성껏 장만하여 제사를 받들 때 지하에 계신 조상들도 흐뭇하게 흠향(歆饗)하실 것이라 믿는다. 만약 가족 사이에 제사와 제수 문제로 불화(不和)하고 반목(反目)하며 마음이 상하게 되면 어느 조상이 기쁜 마음으로 흠향하겠는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이치도 매양 일반이다.
살아 있는 사람을 대접하는데 정성이 부족하면 감동을 줄 수 없듯이 죽은 사람에 대한 태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는 ‘제사 지낼 적에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지내라.(祭如在)’라거나 중용(中庸) 19장에서도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살아있는 사람 섬기기와 같이 하라.(事亡如事存)’라고 하였다. 이번 추석에는 모든 가정에서 둥그런 보름달 아래 웃음꽃이 피는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명절을 보내기를 바래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