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화가협회 자문위원 권영섭 선생
“제 만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영주사람이 참 많습니다. 친한 친구의 이름도 있고, 이웃 어른들의 함자도 가끔 등장하지요. 소백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영주사람이 참 좋아서 자주 고향을 떠올리는 만화를 그렸습니다”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지낸 향토 출신의 만화가
지난 1959년부터 연합신문에 ‘우리들의 척척박사’를 연재한 만화가 권영섭(67)선생은 영주가 낳은 만화계의 큰 별이다. 영주에서 ‘송가상회’라고 하는 큰 포목상을 경영하던 부친을 두고 삼형제 중에 둘째 아들로 태어난 권 선생은 영주중학교와 영주농고를 거쳐 서울의 중앙고를 졸업했다. 학생 시절부터 그림을 잘 그리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연합신문의 만화 공모에 입선하여 그길로 신문사에 일자리를 얻어 만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영광중학교 뒤편인 “숫골에서 오랜 동안 살았다”는 선생은 영광교육재단 이사장을 지낸 강석일 장로의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에 살았던 관계로 어린 시절부터 고인이 된 강학구 이사장 등과도 친하게 지냈으며, 홍사덕 전 국회의원이나 권영창 영주시장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학창 시절 운동도 잘하고 특히 영어와 미술에 재능이 있던 학생이었다”고 말하는 선생은 체육시간에 무술시범을 보이기도 하고, “지나가는 차의 꽁지에 매달려 가는 장난도 많이 치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그림을 잘 그려 동창생을 모아두고 “만화를 그려가며 재미난 이야기를 하면서 웃기기고 하고, 늘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고 창작하면서 만화가로서의 기량을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남들보다 빠른 약관의 나이에 만화가로 데뷔를 하여 명성을 오래도록 날리고 살아가나 보다.
'방울이'와 '봉선이'로 한국 만화사의 큰 획을 긋다.
아무튼 연합신문에 3년간 그린 ‘방울이’가 주인공이었던 만화는 당시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1960년 한국최초의 순정만화로 불리는 ‘봉선이’를 그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일약 만화계의 기린아로 떠오르게 된다. 당시 매달 한 권 분량의 만화를 그린 그는 매일 20시간 넘게 일하면서 만화와 동거했다. 봉선이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출판사들이 “한 달에 두 권을 그려주면 계약금으로 당장 집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작이었다.
하지만 돈에 별로 욕심이 없던 부잣집 아들이라 ‘늘 충실하게 일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매달 한 권 정도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런 노력 때문인지 지금까지 수백 권의 만화를 직접 그렸다.
또한 선생은 지난 1968년 만화가협회를 만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92년부터 97년까지는 자신도 한국만화가협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만화가이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여 현재는 전도사로도 일하고 있다. 요즘은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영동중앙교회에서 전도 일을 하고 있다. 부인 역시도 신학을 공부하여 전남 강진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현역 목사이다.
신학을 공부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라서 그런지 만화를 그려서 받은 작품료는 전부 이웃을 돕거나 헌금을 주로 하여 “일흔이 다된 노만화가임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서울의 변두리인 은평구 진관외동의 집 한 채 뿐”이라고 한다. “지금도 돈에 대한 욕심은 없고 집착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어린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하고 늘 모친이 다려주는 인삼을 40년 넘게 장복한 관계로 더위도 타지 않고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강인한 체력을 지니고 있다. 요즘도 가끔 “젊은 사람들과 팔씨름을 해서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보고 주위에서 놀라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또한 만화를 그리는데 필수적인 “좋은 눈을 타고나서인지 아직도 작품을 그리는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타고난 건강과 좋은 눈이 만화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나아가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소백산 인삼의 힘이 평생을 건강하게 만화를 그릴 수 있는 원천이 되었다. 그는 또한 한국의 수많은 대학의 만화과 설립에 일조한 공로가 있다. 인덕전문대, 목원대, 공주대학 등에 현재도 출강을 하고 있으며, 한국이 ‘만화 강국, 에니메이션 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전국 100여개 대학의 만화과 설립에 산파역을 자임하기도 했다.
아울러 아시아만화대회 실행위원으로 한일만화교류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며, 중국 연변지역에 연변만화가협회 결성을 돕고 한국 만화와 문방구를 대량으로 지원하여 중국의 조선족 문화권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북에 한국 만화와 문방구가 흘러들어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그가 프랑스 안시에서 열리는 에니메이션 페스티벌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심사위원으로 초대되었을 때는 한국 작품인 “오세암”이 그랑프리의 영예를 안도록 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최근에도 프랑스와 포르투칼의 만화가협회 초청으로 만화 애니메이션전시회를 참관한 적이 있을 정도로 작품 활동은 물론 전시회참가, 만화, 애니메이션대회의 심사위원으로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본인은 전도사, 부인인 목사로 시무 중
그는 지금도 서울 카툰회 고문직과 대학 강사 일을 하면서, 한서일보, 자유신문, 안동권씨 종보 등에 틈틈이 만화를 그리고 있다. 수상경력으로는 58년 대구매일신문 만화공모입선, 59년 연합신문 만화공모입선, 77년 한국만화상, 2004년 세계만화대회 공로상 등을 받았다.
또한 한국만화가협회장, 자문위원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한국어린이전도협회장, 만화문화연구소장, 한국만화문화대상 심사위원 및 조직위 부위원장,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 조직위원, 문체부 문화산업자문위원, 동아시아 만화대회 임원, 춘천만화축제 조직위원, 아시아 만화대회실행위원장, 프랑스 안시 에니메이션 페스티벌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의 가족으로는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동양통신, 문화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한 권화섭씨가 친동생이며 목사로 시무 중인 부인과 대를 이어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큰 아들과 대학에 다니는 둘째 아들이 있다. 또한 평소 친하게 지내는 영주출신의 인사로는 서울대 교수를 지낸 경제학자 송병락씨와 박세환 전 국회의원, 학교장을 지낸 우성권 선생, 경찰공무원이었던 이상호씨, 영주향우회 부회장을 지낸 이종화씨, 효성그룹에 근무했던 정완수씨, 복지재단이사장을 지낸 조태영씨 등이 있다.
선생은 “아직도 몸과 마음이 건강한 관계로 늦은 나이까지 천직인 만화를 꾸준히 그리고 싶다”며 사진 찍기에 멋진 포즈를 취했다.
(권영섭 선생 전화 연락처 011-774-39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