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 (시인)

애인론

-홍계숙

이 세상 어딘가에 핀
보랏빛 짙은 도라지 꽃말이라던가, 달빛 아래
노랑이 눈부신 달맞이 꽃말이라던가
서가에 꽂혀있는
퐁네프 연인들의 아찔한 입맞춤 같은
초승달 웃는 입가에 조그만 점 하나
개밥바라기 별빛 같은
그 미소 너머로 은하수가 환하게 번지는
한 뼘 멀리 있기에 맨드라미 꽃빛만 짙어지는
세상이라는 책갈피 어디쯤 감추어
몰래몰래 펼쳐보고 싶은
그 페이지 깊숙이 간직한 네잎클로버 같은
어느 삶 모퉁이를 샤갈의 그림처럼 다녀갈
기꺼이 뭉게뭉게 꽃구름으로 피어날

그마저 스쳐 지나면 천년은
더 기다려야 할,

 

-설명서 한 장 없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는 방식으로, 알 수 없는 불을 지피고 그 불길을 키우게 됩니다. 온몸 가득 생생한 기운을 채워 넣고 끝 간 데 없이 욕심을 부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조그만 성을 만들어, 맑은 종소리 댕댕댕 울리는 설렘을 안고 조심조심 거닐어도 봅니다. 생각만 해도 콩닥거립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피어난 사랑으로 고백서 같은 시 한 편쯤은 남기지 않을까요?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한 천년 후 다시 태어난다면 그리운 이 하나쯤 훔쳐 업고 뉘 모를 곳에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요?

시인 로버트 블라이는 「사랑에 관한 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는 풀을 사랑하게 된다./헛간도, 가로등도/그리고 밤새 인적이 끊긴 작은 중심가들도.’ 무언가를 사랑하게 되면 작고 소소한 것들이 눈물겹고 귀해지나 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숙연한 사랑이고, 사랑 자체가 아득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