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김동수 해도과장
얼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이동통신회사인 일본의 NTT DOCOMO의 사람들과 함께 한국의 여러 지도회사와 건설교통부 산하의 국토지리정보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한국의 종이지도와 전자지도를 구매하여 한국 내 이동통신회사들과 제휴하여 지도정보서비스사업을 해볼까 하는 검토 출장 팀의 통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여러 곳을 방문하면서 느낀 것은 한국의 지도제작 수준이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과 전자지도의 경우에는 이미 1/1,000 축척지도가 상용화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울러 서울의 경우에는 일본어로 된 전자지도도 제작 완료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바다지도를 만드는 영주사람
일본 친구들 모두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종이지도에 있어서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일본이지만, 전자지도 분야에서는 이미 한국이 훨씬 앞서고 있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라워했고, “한국의 밝은 미래와 정부의 역할에 경의를 표한다”는 말까지 했다.
어린 시절 세계지도를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 속의 세계여행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단 1시간 정도면 지도를 보면서 즐길 수 있었고 국가와 도시 명을 읽으면서 지리적인 상식과 사회에 대해서도 느끼고 배웠다.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컴퓨터를 통하여 지도를 접하고 휴대폰을 가지고서 길 찾기를 하다 보니 지도 보는 것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20-30년 전의 아이들은 교실에서 손으로 그린 괘도나 큰 세계지도를 보면서 상상을 하며 세상을 배우곤 했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가정에서 지구본을 만져보는 것도 힘들었고, 큰 세계지도를 방 한구석에 걸어두는 것이 꿈이었다. 지금도 집안 한구석에 숨겨진 지도책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에 잠기는 나이든 어르신들이 있을 줄 안다.
여기 일본보다 앞선 세계수준의 지도를 직접 보고 만들면서 어린 시절의 꿈을 현실화한 사람이 있다. 인천에 위치한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김동수(59) 해도과장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김동수씨는 지난 1947년 이산면에 태어나 전쟁 때 행방불명된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평생을 과부로 살아온 어머님과 함께 영주읍내에서 성장했다. 밑으로 여동생이 하나 있어 세 식구는 영주초등학교 인근에서 모친의 삯바느질로 연명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도그리기와 읽기를 좋아하던 그는 영주초등학교와 영주중학교를 마쳤고, 공부를 잘해 영주농고를 3년간 장학생으로 다니며 졸업한 김동수씨는 지도로만 가보았던 서울로 올라가 연세대학교에 도전해 보았지만 낙방하고는 한동안 영주에서 집안일을 돕다가 군청의 임시직으로 들어가 1년 반을 일했다.
당시 인구조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임시직으로 일하게 된 것이 그의 공무원 생활 시작이다. 하지만 임시직은 오래 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아 그만둔 후 호기심에 교도관 시험을 보고 인천에서 ‘일반인은 평생 한 번도 가보기 힘들다’는 교도소를 무상으로 출입하는 교정공무원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것도 촌색시같은 여린 성격 때문인지 ‘창피하고 보람이 없다’는 생각에 3년을 하다가 그만두고 만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던지라 3D업종도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힘들어 허드렛일을 하면서 2년을 넘게 애를 먹었다. 그런 가운데 늙은 노모는 자식걱정에 보따리를 싸들고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에서 리어커에 짐을 싣고 미아리의 산동네 판자 집에 자리를 잡게 된다.
어렵게 신문구인광고를 뒤적이다 체신부 공무원 시험과 교통부 수도직 시험을 동시에 합격하여 먼저 발령이 난 우체국에 잠시 근무하다가 적성에 맞는 해양지도제작일을 전담하는 교통부의 수도직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그는 수도직 공무원으로만 현재 32년째 근무하고 있다. 네 번의 공무원 생활을 전부 합하면 처음 시작한 군청의 임시직 공무원으로부터는 40년에 이른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좋아하던 지도 그리기와 읽기에 취미를 살려 지금도 지도를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다.
바다 중심의 거꾸로 된 세계지도를 만드는 데 주역
그의 지도에 대한 관심은 요즘도 어느 바다, 어느 반도의 이름이든 모두 기억하고 있으며, 조그만 나라의 수도는 물론 산맥과 강줄기, 국경선의 모양 등을 모두 이해하고 암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 제작된 ‘거꾸로 된 세계지도’의 마무리 작업이나 괘도제작 등에도 남다른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지도에 대한 애정과는 관계없이 그는 지도를 직접 만들고 실측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지는 못했다. 30년 넘게 지도 제작에 필요한 지원 사업을 담당하는 일을 하다가 지난 2004년에야 비로소 우리나라 바다지도 제작을 총괄하는 해양수산부 국립해양조사원 해도과장으로 임명을 받아 평생의 꿈을 이루었다. 이를 두고 해양수산부 관계자들은 “정말 마지막으로 제자리를 찾아서 해양지도를 만들게 되었군요”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지도와 지리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기억하고 있다. “고향 영주는 전국에 내놓아도 빠지는 않는 문화재의 보고로 국보가 7개, 보물이 4개나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며, 사과생산량도 전국 산출량의 15%에 달하며, 영주인들은 강건하고 고집이 있으며, 성실하다”는 지역적인 특징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직업과 관련된 업무를 말하면서 “바다지도는 육지지도와는 달리 최고의 정밀도가 요구되며 특히 물 아래에 있는 암초를 정확하게 찾아내어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 해상안전에 꼭 필요한 사업이다”라는 주장과 함께 “한국의 지도 수준은 과히 세계적”이라는 긍지도 잊지 않았다.
한편, 김동수씨를 두고 주변에서는 “늘 손해 보는 사람, 꼼꼼하게 잘 챙기는 사람,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워낙 가난하고 어렵게 자라왔고, 어린 시절부터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살아온 탓인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전국의 친지, 친구, 이웃의 애경사는 빠짐없이 다니는 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지 외아들인 그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수백 명이 문상을 다녀갈 정도로 그는 주변의 신뢰를 받고 있다.
또한 솔직하고 정직한 공무원으로 직장은 물론 향우회, 동문회 등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는 믿음직한 인물이다. 그는 어려운 시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늦은 나이에 방송대에 진학하여 행정학을 공부하였으며, 외국어대 대학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기도 했다. 아울러 서울대 대학원 해양 정책과정을 이수하면서 만학도로 열성을 다하기도 했다.
40년 가까운 공무원 생활과 만학으로 대학원 졸업
그는 연세대학과 대학원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여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큰아들 한힘(29)과 홍익대학에 재학 중인 둘째아들 대룡(25)군과 함께 경기도 광명에서 15년째 살고 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영주 출신의 친구들은 만화가 김판국씨, 화가 이두식 교수, 연극연출가 손진책씨, 농업기반공사에 근무했던 권용칠씨, 철도청에 근무한 박찬영씨, 조경업을 하는 금창언씨, 영주에 있는 손만식, 김창돈, 임호상씨 등이 있다고 한다.
“고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서울에 와 본 적이 없었다” 촌사람인 그는 교정직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당시 광화문에 있던 국학대학의 시험장에 갔다가 수세식 화장실을 처음 사용해 본 경험과 놀라움을 말해 주기도 했다. 또한 ‘촌색시’로 불리던 학창 시절부터 “늘 남의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덕분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말과 부친이 행방불명되어 어려웠던 학창 시절에 관한 추억도 되뇌었다. 아울러 자신은 “외동아들로 군대에 갈 수 없었기에 나라를 위해 두 아들은 모두 현역으로 입대시켰다”는 말도 들었다.
그를 만나면서 건강하고 바르게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아온 이 시대 소시민의 참모습을 다시금 발견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김동수 과장 전화 연락처 011-589-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