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일찍이 익재(益齋)에게 학업을 받았었고/독립(獨立)의 당시에도 명성이 있었어라./선을 쌓은 집안이라 경사가 잠재하고/노성은 멀리 갔지만 전형은 남았지요./금준이라 좋은 술 봄이 노상 가득하고/바둑돌 바둑판에 날이 또 저물더니/선인장 이슬 못 가진 게 가장 한스러운 일/한 잔이면 문원의 소갈병을 구할 텐데.”
이 글은 삼봉 정도전 선생의 문집인 ⌈삼봉집(三峯集)⌋ 제2권 칠언율시(七言律詩)에 밀직(密直)인 이창로(李彰路)를 곡만(哭挽)하는 율시이다.<주-원문은 본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 익재 이제현의 아들인 이창로의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바둑과 술을 즐긴 사실과 한나라 때 사마상여(司馬相如)처럼 이창로도 소갈병(消渴病: 일종의 당뇨병)이 있다는 사실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무제가 신선을 사모해 건장궁(建章宮)에 구리로 선인장을 만들어 세워서 이슬을 받게 해 그 이슬을 마시고 수명을 늘려 보려고 했던 고사를 인용하여 이창로의 소갈병을 낫게 해줄 방법이 없음을 가장 한스럽다고 미련(尾聯)에서 표현함으로써 고인에 대한 우정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삼봉의 만시(挽詩,輓詩)를 소개하는 이유는 만시라는 문학 형식을 통해 옛날의 장례문화와 오늘날의 장례문화에 대한 단상(斷想)을 말해보려고 한다. 만시(挽詩)는 간단하게 말해 옛날 문사(文士)들이 죽은 사람을 애도하기 위해 지은 시다. 때로는 ‘만시(輓詩)’라고 쓰기도 하는데, 만(挽)은 끈다는 뜻으로 상여(喪輿)를 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시를 짓는 대상은 친구가 일반적이고 그 외에도 죽은 아내를 위한 도망시(悼亡詩), 차마 있어서는 안 될 참척(慘慽)한 일이기는 하지만 죽은 자식을 위한 곡자시(哭子詩), 스승과 제자, 선배 혹은 후배를 위해 지은 만시가 있고 때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위해 쓴 만시도 가끔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기린 자만시(自輓詩)를 짓기도 하고 혹은 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서 미리 만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를 생만시(生挽詩)라고도 한다.
마치 살아있는 상태로 자신의 사후에 묘지로 쓸 땅을 미리 정하는 신후지(身後地)와 묘지인 수장(壽藏), 수실(壽室) 또는 수당(壽堂), 수장에 미리 세우는 비석에 쓴 글인 수장명(壽藏銘)을 짓는 일 같은 것도 옛 선현들의 하나의 문화 현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선현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미리 담담하게 자기의 손으로 자기 죽음의 준비를 하면서 자식들의 고민도 덜어주고 동시에 자기 손으로 자기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필자가 젊은 시절 교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모 교감 선생이 자기 부친께서 미리 자기의 사후에 부고(訃告)를 보낼 주소를 손수 정리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책의 이름이 ⌈명인록(明仁錄)⌋이라고 기억되는데 ⌈예기(禮記)⌋의 「제통(祭統)」에 선조의 선행이 있어도 알지 못하면 밝지 못한 것이고 알기는 알아도 이를 전하지 못하면 어질지 못하다 라는 ‘유선이부지(有善而弗知).불명야(不明也).지이불전(知而弗傳).불인야(不仁也).’에서 나온 말을 거꾸로 한 말이다.
즉, 내 자손들이 불명(不明)과 불인(不仁)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깊은 배려에서 ‘명인(明仁)’이란 말을 가지고 온 것이다. 옛날에는 이런 것이 자손들을 위해 부조(父祖)들이 배려한 하나의 문화였다. 오늘날 불고염치(不顧廉恥)하고 악착같이 재물을 모아 자손들에게 물려주려는 자본주의 문화와는 여러 측면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문화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런 ⌈명인록(明仁錄)⌋은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사를 무상(無常)으로 해야 하는 도시 생활과 SNS 기기의 탄생으로 인해 이제는 부고를 문자로 보내고 장례도 2박 3일 만에 끝내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산업화사회, 정보화 문명, 최근 들어서는 소위 AI 문화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로의 문명사적(文明史的) 전변(轉變)이 이루어진 현대사회에서 옛 방식의 장례문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참으로 격세지감이 든다.
그러나 아무리 문화적 기반이 달라졌다고 해도 만시를 지어 고인을 애도하는 장례문화는 반드시 존속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적어도 만시를 짓는 동안에는 고인과 생전에 가졌던 의미 있는 시간과 여러 추억을 회상하게 되고 그런 회상의 과정에서 떠오른 경험의 정수(精髓)를 뽑아 일정한 형식의 만시에 담는 일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꼭 한시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나 가사, 수필, 간단한 조사(弔辭) 등의 형식을 빌려서 글을 짓고 이를 문상할 때 읽으며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빔과 동시에 유족들에게 조의를 표하는 고급문화만큼은 오래 지속됐으면 한다.
그냥 부의 봉투나 들고 가는 것보다는 삼봉 선생의 경우처럼 글이라도 한 편 정도는 지어서 조문을 가는 것이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