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는 차비 ‘단돈 500원’ 으로 성공신화를 일궜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초등 졸업후 곧바로 취업...배관 용접 기술 배워
밤낮없이 일해 용접기술 인정받고 용접 회사 창업

초졸학력으로 구의원 4선, 의장도 4번 역임 ‘신화’
보안등 자동점멸기 개발...강남구 자매결연 주선도

이재창 애향인은 기업인이다.

강남 영동MG새마을금고 이사장, 태양트레이(주) 회장, 한강자동차운전전문학원 회장을 겸하고 있다.

그의 기업인 입신 기반인 태양트레이(주)는 청계천에서 창업(창업 당시 이름은 태양공업)했으며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김포로 확장 이전했다.

이재창 이사장은 강남구에서만 구의원으로 4선을 지냈으며 강남구의회 의장을 네 번이나 역임했다.

이 이사장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요즘으로 보면 미성년이 취업을 한 것이다. 그만큼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그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거친 시기는 강남구의회 의장일 때였다. 당시 그의 검정고시 합격은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 강남구만이 아니라 전국적 화제가 됐다. 지금의 이 이사장은 대한민국의 노른자위라 할 강남구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능올림픽 금매달 수상 기념(1969.4.25)
기능올림픽 금매달 수상 기념(1969.4.25)

어디에서 태어나 자라셨는지요?

제 고향은 영주시 이산면입니다. 봉화에서 태어났으나 제가 아기 때 이산면으로 가족이 모두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산초등학교 25회 졸업생입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리 길을 걸어서 다녔습니다. 검정고무신이 닳을까 맨발로 다니다 학교 근처에 도착해서야 신었습니다. 

그 검정고무신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제 것이 생겼습니다.

맨발로 뛰는 게 일상이다 보니 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 경주에서 제가 1등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상이 공책일 때였습니다. 공책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고향의 학창 시절 추억은 초등학교만 다녔는지라 그때의 기억 뿐입니다. 참으로 경제적으로 살기 힘든 시기였습니다.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하는 가정 형편이었군요. 그때부터 일할 생각을 하셨나요?

사업초창기 태양공업(주) 현판 게양식
사업초창기 태양공업(주) 현판 게양식

초등학교 졸업을 하면 자전거를 타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자전거 사달라고 부모님께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할 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봉화에 사시던 외할머니가 겨울이면 상대적으로 온화한 우리 집에 와 계셨습니다. 외할머니는 겨울이 되면 기침을 많이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어려운 형편에서도 기침 치료에 좋다는 소 지라(비장)를 구해 오시곤 했습니다. 외할머니께 일을 하고 싶다 하니 옛날이야기와 함께 ‘목수는 깍는 일이라 돈을 못 벌고, 땜쟁이는 붙이는 일이니 돈을 번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모으려면 붙이는 게 훨씬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용접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면 그때 일자리를 찾으셨나요?

기술만 배울 수 있으면 돈을 받지 않아도 좋았습니다. 기술을 배우고 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면 인턴인데 당시엔 급여를 주는 곳도 없었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밥 먹기 힘든 시절이니 ‘재워주고 먹여주고 기술 가르쳐주는 곳’이면 최고였습니다.

당시 기차는 증기기관차였습니다. 기관차 물탱크 물 공급 배관이 새면 안 되는지라 영주역에서는 배관 용접 일이 매일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배관 용접 용역을 맡은 사람과 연결돼 용접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장이 기술을 잘 배우면 서울에 취직 시켜준다 해서 희망에 부풀었습니다. 희망에 부푸니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제가 용접한 배관은 수압 시험에서 한 번도 불합격한 적이 없었습니다. 용접 용역 사장도 그런 ‘땜쟁이’는 처음 보았다 하였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했습니다. 서울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컸으니 작은 불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서 표지(이재창의 강남 32년 - 이재창의 생각)
저서 표지(이재창의 강남 32년 - 이재창의 생각)

결국 서울로 가시게 되었나요?

용접 용역 사장에게 이제 서울로 보내달라고 하니 처음에는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조르고 졸랐더니 일할 공장을 추천한다며 주소를 건네더군요. 서울 갈 차비 500원을 달라니 300원만 주더군요. 당시 솔방울과 갈비(소나무 낙엽) 팔아 모은 돈 200원을 부모님께 조르고 졸라 얻어 영주역에서 밤 12시 기차를 타고 그 사장이 알려준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습니다. 지금의 중국대사관 자리였습니다.

때는 겨울인지라 엄청 춥더군요. 공장이란 곳이 함석지붕에 구멍이 숭숭한 판자촌으로 담요 하나에 넷이 자며 보일러 용접하는 곳이었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으나 집에 돌아갈 차비도 없었습니다. 보일러 용접을 하면 그 열기로 추위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제가 밤낮없이 용접 일을 하니 3일 동안 2대 용접 하던 보일러를 매일 보일러 하나 용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수압 시험에서도 완벽하였습니다.

저를 보는 눈들이 달라지더군요. 한 달 뒤 월급으로 600원을 받았습니다. 모두 저축통장에 넣었습니다. 일을 통한 용접 기술이 소문나 69년 세계기능올림픽에도 참가했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 뒤 공장이 대박 났으나 제 사업을 하고 싶어 청계천에서 태양공업(주)를 창립했습니다. 강남 개발 초창기에 강남 집도 샀습니다. 밤낮없이 일하니 회사도 성장했습니다.

정치도 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사업이 잘 되니 경제적으로 집안이 안정되고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마다 청소년 선도와 반공연맹(현 자유총연맹) 지도위원을 비롯해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강남구의회 의원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가 있어 출마하니 제 이름이 워낙 알려져서 그런지 초등학교 졸업 학력임에도 경쟁자가 나서지 않아 무투표 당선이었습니다. 네 번이나 연달아 반 강요(?)를 받고 구의원에 출마해 모두 1등으로 당선됐습니다.

강남구의회 의장일 때 의장이 ‘국졸(초등학교 학력)’일 수 있겠냐고 해 검정고시 시험을 보고 합격했습니다. 전국일간지에 제 소식이 실렸습니다. 구의회 의장이 검정고시 보고 합격했다니 신기했나 봅니다. 대학은 동국대 경영학∙북한학 복수전공이며 2000년 학번입니다.

이사장님께서 강남구의회 의장일 때 강남구와 영주시가 자매결연 협약을 맺었다면서요?

농촌을 도와주자는 취지에서 추진했습니다. 당시 영주시장이던 김진영 시장이 매우 적극적이셨습니다. 강남구청에서 자매 결연 MOU만 체결하자는 말도 나왔습니다. 강남구 의원들의 협조로 MOU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자매결연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당시 김진영 시장과 영주시의회 송화선 의장이 상경하셔서 협약체결을 하였습니다.

강남구와 영주시의 자매결연 후 영주의 특산품인 영주한우, 풍기인삼, 풍기인견, 영주사과를 강남구 주민들이 소비하고 그에 매료된 분들이 많아 지금도 뿌듯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영주한우는 강남구 여러 동이 경쟁적으로 전시판매 장소를 제공하려는 등 인기가 높습니다.

역대 영주축협 조합장들도 매우 적극적입니다. 협약 체결 후 영주시 초청으로 강남구의회와 새마을부녀회 등 여러 단체가 영주를 방문하고 유서 깊은 곳을 방문하며 감탄하고 영주시의 특산품들에 매료되었습니다. 영주시가 가뭄으로 고행할 때 강남구에서 양수기를 기증했던 기억도 납니다. 김진영 시장이 강남구 의회를 방문하면 구의원들이 전원 모이곤 했습니다.

구의원 활동을 하시면서 영주시와의 자매결연 협약과 구체적인 사업 협력도 하시는 보람이 있었군요. 다른 사례도 소개해 주시지요

사업으로 50년을 보냈습니다. 요즘 시골에도 보안등이 있습니다만 처음 보안등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일일이 저녁에 켜고 아침에 끄곤 했습니다. 그 보안등도 몇 곳만 설치했었습니다. 제가 자동점멸기를 개발했습니다. 밤낮을 자동으로 감지해 보안등이 켜지고 꺼지도록 했습니다. 범죄 없는 지역으로 강남을 대낮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CCTV도 강남구에 처음으로 설치했습니다.

당시 구청∙구의회 자문 변호사들이 사생활 침해 우려를 들어 반대했습니다. 시범으로 5개를 설치했는데 CCTV 덕분에 도둑을 잡는 일이 발생하니 강남구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CCTV 설치를 요청하여 많은 곳에 설치했으며 범죄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강북의 여러 구에서도 CCTV 설치를 요청했습니다. 강남 도둑이 강북으로 몰려왔다는 이유를 들면서 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런 요청 초장기에 강남구에서 다 사주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강남구는 구청과 구의회가 떨어져 있다는 겁니다. 긴밀히 협조하고 견제하는 차원에서 아쉽습니다. 회사 직원 자녀들에게 교육 기회를 주었습니다. 회사 직원으로 근무하면 자녀들에 100% 장학금을 지급해 대학까지 마치도록 하였습니다. 그 직원들이 지금도 근무하고 있습니다. 30년 40년 된 직원들이 여럿입니다.

재경영주향우회 활동에도 적극적이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향에서의 추억이 가난의 역경도 있지만, 고향은 제게 늘 동경의 대상입니다. 자연히 영주향우회 모임에도 가게 됩니다. 현 박찬흥 회장이 매우 열심입니다. 권혁현 영주시 서울사무소장도 열의가 큽니다.

희생적으로 향우회 일을 보는 분들도 계십니다. 영주시에서 재경영주향우회와 협력을 잘 하면 출향인들이 고향을 더 아끼고 더 자주 방문하고 고향을 홍보하여 훨씬 더 영주시민에게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특히 금년은 풍기인삼 세계EXPO가 있으니 더더욱 잘 협력하면 좋겠습니다.

영주시 공무원이나 시민들에게도 한 말씀을 부탁합니다.

다른 지역과 자매결연 맺었으면 긴밀한 접촉을 이어가야 합니다. 영주 농산물을 강남구에서 전시 판매할 때에도 시장 등 고위공직자가 참가해 자매결연 지역의 공직자 및 시민들과 만나야 합니다. 자주 연락해야 효과가 높습니다. 영주시민이 당연하게 보는 것들이 외부 사람에게는 높은 가치로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수서원만 하더라도 ‘최초 사립대학’입니다. 어떤 특강에서 연대 총장을 역임했던 분이 ‘최초의 사립대학, 소수서원’을 방문해 감명받았단 이야기를 하고 청중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걸 보았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영주의 유적, 산품들에서 우리나라 최초, 세계 최초, 전국 유일, 세계 유일 등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황재천프리랜서 기자/ 오공환 기자

이재창 이사장의 프로필

- 영주 이산초등학교 졸업
- 검정고시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 마침
- 동국대 경영학, 북한학 복수전공,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석사
- (현)강남영동 MG새마을금고 이사장
- 태양트레이(주) 회장, 한강자동차운전전문학원 회장
- (현)한국금속공업협동조합 이사, 강남소방서 홍보위원회 간사
- (현)법무부 범죄예방위원회 서울 중앙회부회장
- (현)국민의힘 자문단 회장
-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이사
-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위원
- 한나라당 서울 기초의원협의회장
- 전국시군자치구의회의장협의회 회장
- 강남구 의회 4선 의원(의장 4회 역임)

- (상훈) 국민훈장 목련장, 세계사회봉사평화상
- (저서)『단돈 500원으로 이룬 나의 꿈 나의 성공』, 『나의 강남 20년』,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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