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있는 그곳이 바로 교회 ‘건물 없는 교회’의 문을 열다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홍대 거리 카페에서 주일 예배...젊은이들의 인생 상담도
대형교회 사역 경력...‘사회와의 소통’에 목회활동 방점
한 명 전도하더라도 예수의 뜻 실행하도록 하는 게 목표

영주 출신 애향인들 중 종교인도 여러 명이다. 그 중에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 분들도 많다.

비 기독교인에게 교회는 거대 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언론에 빈번하게 나오는 교회의 목회자들이 거대 교회 소속이기 때문이다.

규모로만 따지면 크고 작은 다양한 교회들이 있다.

‘목사님’들을 만나 명함을 교환하면 모두 어느 교회이든 그 소속이 있고 그 교회는 특정 장소에 있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교회와 교회가 위치한 장소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교회는 건물이라는 것이다. 영주 출신의 권용선 목사에겐 교회라는 건물이 없다. 교회 건물이 없지만 목회 활동을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한다. 그에겐 사람이 교회다.

서울 홍대거리의 일요일 오전 어느 까페는 권용선 목사의 예배 장소

권용선 목사(이하 권목사)에게 교회 건물이 없지만 예배 장소는 정해져 있다. 권 목사가 예배를 보는 곳은 서울 홍대거리의 카페이다. 카페의 소유주가 아니라 카페를 빌려서 예배를 본다. 일요일 오전의 카페는 대체로 영업을 하지 않는다.

영업을 하지 않는 매주 일요일 오전 까페는 권 목사가 예배를 보는 장소가 된다. 빌려주는 카페 입장에서는영업을 하지 않는 시간에 수입원을 만드니 운영면에서 효율적이다. 건축을 하느라 교회가 헌금을 모으지도 않고 차입도 없고 소상공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예배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고향을 방문한 권 목사는 영주의 한 카페에서 기자를 만나 인터뷰에 응했다. 도자기로 벽면을 가득 채운 카페였다. 부모님을 뵙고, 친구들도 만나고 주말에 열린 소백산철쭉제에 동참하기 위해 고향에 온 것이다. 또 영주의 지금 삶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도록 친구 넷이서 뜻을 모아 몇 년 전부터 영상과 글로 기록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고향을 이야기할 땐 그의 눈빛이 더욱 살아난다.

건물 없는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신다니 일반인들에게 생소합니다. 목회 활동이 잘 되나요?

카페을 빌려서 드리는 예배
카페을 빌려서 드리는 예배

건물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지만 건물이 없어도 예배가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활동으로 기독교가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 건물에서의 예배에 익숙한 분들에겐 생소하겠지만 저와 성도들이 예배를 보고 예수님의 뜻을 실천함에 있어 교회 건물이 없이도 현재 성도들이 잘 활동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활동은 정신지체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 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하며 현재 일곱 분이 프로그램 주관자로 나머지 분들은 조력자로 돕고 있습니다.

오전에 카페가 문을 연줄 알고 오는 카페 손님도 있지 않나요?

성도들과 예배를 보다 보면 브런치로 식사를 하는 외국인들이 기웃거리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 들어오라고 합니다. 카페 시설을 사용하여 커피 등 먹을 것을 대접합니다. 저도 바리스타 자격증을 갖고 있지만 성도들 중에도 바리스타 자격증을 갖고 있는 분이 여럿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성도들 중에 영어에 능숙한 사람이 여럿이라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들도 금방 어울리곤 합니다. 가끔 카페 밖에서 춤추는 사람들에게 커피를 대접하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그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곤 합니다.

이런 질문 드려도 될지 모르지만... 카페를 빌려서 하는 목회 활동인데 월급(?) 제대로 받고 계시는지요?(웃음)

카페를 빌려서 하는 예배 성가 합창 모습
카페를 빌려서 하는 예배 성가 합창 모습

월급 받습니다. 초창기에는 3년 정도 월 100만원, 그 뒤 4년간은 150만원, 현재로는 200만원으로 올랐습니다. 모든 예산은 위원회에서 정합니다.

제가 결정하지 않고 저는 감사히 받습니다. 이 밖에도 받는 돈이 있습니다.

사회와의 소통 활동 프로그램을 하면 그 프로그램 운영 경비를 지원받습니다. 모두 실비 기준입니다.

예산을 생각해야 하니 돈이 적게 들면서도 알찬 프로그램을 만드는 전문가가 다 되었습니다. 저만 그런 프로그램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그런 프로그램을 할 수 있습니다. 헌금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그 정도 수입으로는 자녀들 학비와 생활비 충당이 불가능하지 않나요?

저는 아이가 둘인데, 둘 다 학원을 다니지 않았습니다. 아이들 학비 부담은 주로 사교육비에서 발생하는데 아이들 고등학교 졸업 시까지는 다행히 그런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을 하니 돈이 엄청 들더군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해결했습니다. 저는 사진 찍는 기술이 있습니다.

전시 준비부터 전시회 끝날 때까지 총괄하는 경험도 많습니다. 사진반 개설, 사진 전시 에이전시(액자 제작부터 가대 설치, 팜플렛 인쇄 등 원스탑 서비스) 등 프로그램을 아르바이트로 했습니다. 이제 큰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였으니 부담이 줄어들었습니다. 사회와의 소통 프로그램을 더 알차게 하기 위해서도 아르바이트를 하곤 합니다.

비로봉 소백산철쭉제 참가
비로봉 소백산철쭉제 참가

처음부터 건물 없는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셨나요?

아닙니다. 젊을 때는 대구, 부산, 서울의 대형 교회에서 봉직했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카페를 빌려서 예배를 보는 목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이름도 있습니다. 교회 이름은 INnOUT Church입니다. INnOUT은 in and out입니다. 젊은이들이 영어이름을 쉽게 기억하니 그렇게 붙였습니다.

INnOUT은 ‘안으로 들어와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밖에서 실천하자’ 입니다. ‘사회와 소통하는 교회’입니다. 교회 이름으로만 보면 건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가 힘들기도 합니다만 저는 사회와의 소통에 목회 활동의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유학을 가시기 전에 대형 교회에서 활동하셨다고요?

네. 대학 졸업 후 주로 대형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제가 다른 목회자들에 비해 행정 업무에 밝다하여 그쪽 분야 업무를 많이 담당하였습니다. 지금도 다른 교회를 위해 교육 프로그램을 비롯하여 교회 관련 행정 업무 컨설팅을 많이 하는데 이 때 쌓은 역량 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 전공이 교육공학이라 교육 프로그램을 사람들에 맞게 잘 짰습니다. 또 코칭 교육이란 교육은 찾아다니면서 배웠습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있던 친구에게는 경영전략 식스시그마를 사사받았습니다.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도록 경영적 측면에서 접근하는 프로그램을 잘 만든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기업의 구조조정처럼 교회의 구조조정(주로 재배치, 재정 쓰임새, 교회수지 과학적 관리, 성도 교육리뉴얼)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 목사였는지요?

아닙니다. 증조부와 조부 등 옛 어른들 시대에 불교 분위기였습니다. 집안에 불교 서적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접하였습니다. 저는 청소년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습니다. 영주고등학교를 다니다 2학년 때 학교를 자퇴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풍기고(현 경북항공고) 1학년 신입으로 입학하여 졸업하였습니다. 중학교 친구들 보다 고등학교 졸업이 2년 늦게 되었습니다. 풍기고 재학 시절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교회를 찾았습니다. 처음 세례를 받을 때 망설이던 기억이 있습니다.

풍기고에 입학하면서 우유배달을 하였습니다. 새벽 5시30분부터 우유배달을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우유배달을 하며 뛰어다니니 체력이 좋아졌습니다. 아시안게임에 나가도 될 정도의 육상기록도 세웠습니다. 대학도 풍기고 체육선생님의 모교인 영남대 체육교육과에 지망을 하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사고로 체육 전공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구 대신대 종교교육학으로 입학을 하였습니다. 석사는 서울 총신대에서 하였습니다. 졸업 후 주로 대형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박사는 미국에서 했습니다. 목회 활동을 하다 보니 막히는 게 많다고 느꼈습니다. 좀 더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에서 유명한 신학대학인 플러대에서 공부했습니다. 나이 43세에 유학을 갔으니 늦깍이입니다. 미국에 있는 대형 한인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되었지만 고사했습니다. 좋은 교회에서 소속감을 즐기는 것 보다는 한국에서는 한 명을 전도를 하더라도 예수의 뜻을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또 아이들의 교통사고도 그 때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조카가 탄 차가 낭떠러지에 구른 사고로 많이 다쳤습니다. 한국 뉴스에도 크게 보도된 사고입니다. 둘째 아이는 지금도 앞좌석을 피할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미국은 의료비가 너무 비쌉니다. 치료비만 35만불 나왔습니다. 병원비 처리에 여러 복잡다난한 절차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국 병원이 디테일 치료에 강하니 한국에서의 치료가 좋을 것이란 권유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입니다. 미국에서 엄청나게 나오던 의료비가 한국에 오니 그야말로 ‘감사합니다.’ 였습니다.

고향을 사랑하시니... 귀향을 하시지요?(웃음)

네. 귀향하려고 합니다. 제가 하는 사역 활동이 고향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농촌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들이 주변부에 머물지 않고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인삼라떼를 개발한 것도 고향의 특산물인 인삼의 소비증대에 더하여 사람들이 사회 커뮤니티 속에 들어와 삶을 더 낫게 만들도록 하는데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주에 건의하고 싶은 게 있다면?

공무원들이 해외 시골 마을이 유지되는 이유를 연구했으면 합니다. 미국에 까멜이란 곳이 있습니다. 크린트이스트우드 개인목장이 있는 동네이며 예술인마을입니다. 이곳은 마을 전체가 가게입니다. 집집마다 물건을 팝니다. 그런데 파는 물건이 다 다릅니다. 매년 전세계와 미국에서 수십만 명이 찾습니다. 한 번 가면 또 가고 싶은 곳이라고들 합니다. 직접 가보면 영주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얻으실 수 있다고 봅니다.

권용선 목사 프로필

-안동 출생
-영주 풍기초등학교 졸업
-영주 금계중학교 졸업
-영주고등학교 중퇴, 풍기고등학교(현 경북항공고) 졸업
-대구 대신대(종교교육학 전공), 서울 총신대 목회학 석사
-미국 플러대 선교학 박사
-() INnOUT Church 목사

황재천프리랜서 기자/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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