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미(시인)

세탁 중입니다

-이송희

때 절은 하루를 세탁기에 넣는다
먼지 낀 내 눈과 끌려다닌 발까지
밖에서 돌아온 몸들이 뒤엉키며 돌아간다

우울한 저녁마다 물 뿌리고 씻어내며
어디선가 떠돌다 왔을 몸과 몸이 섞인다
길들은 풀어지면서 다시 감겨 돌아가고

어느덧 잘 마른 내가 세탁기에서 걸어 나온다
이제 나는 그를 넣어 버튼을 누르고
왔던 길, 반대편에서 그가 오길 기다린다

 

-나를 달래는 사소한 방법

사는 일이 때론 너무 야박하여, 소나기나 폭설 같은 갑작스러운 상황이 아니더라도 혹독한 때를 탈 때가 많습니다. “때 절은 하루”와 “먼지 낀 내 눈과 끌려다닌 발”이 안쓰러워 집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우울이 몰아칩니다. 마음의 혈색만이라도 찾아보려고 말라 빠진 빵조각을 씹다 보면, 멍들었던 그 자리가 다시 아파와 짓물러 터져 버리기 직전이 됩니다.

좋으면 웃고 아프면 울줄 아는, 세상이 뭐라고 하든 개의치 않을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몸과 마음을 세탁해 봅니다. 일상의 결마다 스며들었던 젖은 생각들이 조금씩 때를 벗깁니다. 마음 지우는 지우개 하나 넣어 마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어느덧 잘 마른 내가 세탁기에서 걸어 나”옵니다.

산뜻해진 나를 영접하면서 이제 지나간 길들은 되묻지 않기로 합니다. 다만 놓치지 않으려고 잠깐 돌아본 뒤 새로운 길을 또 걸어봅니다.
낡은 보따리 풀듯 나를 고백하고 싶을 때면 의지할 어깨처럼 세탁기를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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