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중등교사에서 대학 강단까지 “큰 보람을 느껴요”

대전뿌리공원 반남박씨 조형물준공식
대전뿌리공원 반남박씨 조형물준공식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문수면 고랑골 출신...초등시절 총명해 ‘월반’
평생 인간의 보편문법 연구 발전 공헌한 학자

미국인 교수 만나 언어학에 관심, 유학길 올라
늘 기차타고 고향 방문, 서울역에서 출발했으면

평생을 언어의 보편문법(普遍文法)이라는 통사론 연구로 보낸 애향인이 있다. 이화여대 박승혁 명예교수가 바로 그다.

어릴 때 이웃 마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같이 다닌 장세일 회장의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박 교수는 자신이 애향인 기획 인터뷰 대상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다.

스스로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언어학계에서는 평생을 인간의 보편문법 연구 발전에 공헌한 학자라고 여김에도 말이다.

태어나 자란 곳과 어릴 때의 가족관계를 소개하시면?

문수면 권선리 고랑골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란곡(皐蘭谷)이라고도 하고 난곡(蘭谷)이라고도 합니다. 통상 고랑골이라고 부릅니다.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4남2녀로 큰 형님과는 20년이 넘는 나이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하나 아니면 둘 정도 낳는 시대인지라 막내의 개념이 흐려졌습니다만 당시 막내라 귀여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형님 내외분과 큰 누님 내외분께서는 모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작은 누님께서는 봉화(닭실)로 출가하셨는데 몇 년 전 자형께서 돌아가시고 지금은 혼자 계시고, 둘째 형님(박승갑: 영주시청 근무, 동장 역임)은 영주 시내에 계십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은 대구에 거주하시고요.

초등학교 제자들이 찾아와서
초등학교 제자들이 찾아와서

고향 마을엔 자주 가시는지요?

고향 마을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이제 없습니다. 터만 남았습니다. 사람이 거처하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허물어졌습니다. 고향에 부모님 산소가 있어 가끔 뵈러 갑니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어버이날 등 기회가 날 때마다 갔는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몇 년째 못갔습니다. 산소에 들어가는 길은 이제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풀과 나무들이 우거져 접근하기 힘듭니다. 이따금 아이들도 함께 가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아이들이 산소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에서 학교를 다니셨는지요?

초등학교는 와현에 있는 문수초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와현의 문수초등학교는 문수면에서 가장 먼저 생긴 학교입니다. 장세일 회장이랑 같은 해에 입학했고 졸업은 제가 1년 먼저 했습니다. 당시 월반(특진)제도가 있었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나니 2학년이 아닌 3학년으로 가서 공부하라고 해서 한 해 위의 선배들과 동기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5년 다녔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치니 부모님이 대구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때 큰 형님께서 대구에서 직장에 다니셨습니다. 친구들이랑 헤어지기 싫었지만 부모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대구에서 경상중학교, 대구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영주시에는 중고등학교 친구가 없습니다.

처음에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고 하는데 그 전에 교대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고등학교 졸업 후 부모님께서는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교대 입학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시 젊은 사람들 사이에는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사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향에 와서 1년을 보냈습니다. 농사짓는 일을 돕기도 하고 한때는 당시 셋째 형님이 계셨던 풍기에 가서 두어 달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풍기 전구리(앞두들)에는 제 외가가 있었지요.

풍기읍에는 이종사촌 누님이 계셔서 거기에 잠시 머물러 있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본가로 돌아와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나무도 하고 그랬지요. 그러다 이래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 교대라도 들어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안동교대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시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아 떨어질 줄 알았는데 다행히 합격하여 다니게 되었습니다.

가정 형편상 교대에 진학하였습니다만 4년제 대학에 가고 싶은 꿈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그 꿈을 실현하는 방법은 졸업 후 대구로 발령받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교대 졸업 성적이 좋아서 대구에 발령을 받아 초등 교사로 근무하면서 영남대 이부대학 영어영문학과에 편입하였습니다. 당시 교대 졸업생은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습니다. 졸업 후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고 싶었지요.

중고등학교에서도 교편을 잡으셨나요?

졸업하고 바로 중고등학교 교사로 가지 못했습니다. 교대에서 수업료 면제 혜택을 받았는지라 의무근무 기간이 있었습니다. 중고교 교사로 가기 전 교육학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경북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하였습니다.

교육대학원을 마친 후에는 학부 때의 전공인 영어영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교수님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모교인 영남대의 일반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하여 영어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영남대 대학원에 입학한 시기에 마침 초등학교 의무근무 연한이 끝나 선산에 있는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았다가 그 후에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옮겼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느라 힘드셨겠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원 논문을 쓰는 게 힘이 많이 들어서 사직을 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소홀할까 걱정도 컸습니다. 당시 대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동안 조금 모아 두었던 돈으로 근근이 어머니와 생활을 하며 논문을 작성하였습니다.

석사학위를 받고 나서는 이 대학 저 대학으로 강사 생활을 하였습니다. 모교인 영남대를 비롯하여 영남공전, 한사대(현 대구대) 등에 출강하였습니다. 그러다 영어학 분야 교수를 구하던 부산여대(현 신라대)에 전임강사로 채용되어 대학교수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전임강사이면 정식 교수인데 유학을 가셨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당시 우리나라, 특히 대구에서 잘 알려진 미국인 한 분이 계셨습니다. 영남대학교에 이분의 흉상이 있습니다. 대구박물관에는 이분이 기증하신 문화재 코너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아더 맥타가트(Arthur J. McTaggart: 1915~2003) 교수님이십니다. 흔히 ‘맥박사님’ 혹은 ‘맥선생님’으로 알려져 있었지요. 맥선생님께서는 저의 후원자이시자 제 인생의 멘토이십니다.

이분은 1950~60년대 미국무부의 외교관으로 한국에서 근무하시면서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경북대학교, 대구·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등에서 강의도 하셨습니다. 1950년대 후반 대구 미국공보원(현 미국문화원) 원장도 역임하셨지요. 은퇴 후 1970년대 중반 영남대학교 초빙교수로 오셨을 때 제가 선생님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분께서 유학을 권하셨습니다. 학비 문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래서 부산여대에서 교편을 잡기 전부터 유학 준비를 하였지요. 당시 언어학으로 미국 3대 명문 대학에 드는 텍사스대학교(오스틴)의 언어학과 박사과정에 지원하였습니다. 텍사스대학교 하나에만 지원하였습니다. 당시는 대학 하나에 지원하여 준비하는 과정도 힘들어서 여러 개 대학에 지원하는 것은 생각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입학 허가가 나왔어요.

학부 학점, 토플, GRE 성적 등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신기했지요. 추측하건대 맥타가트 교수님을 비롯한 모교 교수님들의 추천서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봅니다.

공부를 좋아하셨으니 유학을 하면서도 공부가 즐거우셨겠습니다?

당시 한국에서의 영어 공부는 대개 책을 통한 공부였습니다. 그래서 듣기와 말하기가 약했어요.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발표를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외국어 회화를 배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녹음기 같은 오디오 기기들이 있었지만 그런 기기를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못되었습니다. 유학 초기 주로 책을 통한 공부였고, 발표 자료는 암기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외에는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박사학위 못 받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학 초기에 장모님께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맏딸인 아내가 일시 귀국하는 등 심리적 어려움도 있었지요.

그 후 아내가 미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안정을 찾았습니다. 결국 유학 기간 4년 반 만에 통사론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본래는 박사학위 과정에 입학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간에 석사학위도 받았습니다.

박사 학위 후 바로 교수가 되셨는지요?

처음에는 모교인 영남대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오스틴에서 같이 공부하고 먼저 귀국해서 교수로 있던 분이 이화여대에서 통사론 전공 교수 채용 정보를 알려주어 응모했습니다. 얼마 후 이화여대에서 채용 면접에 참여하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당시 영남대 출신이 이화여대 교수로 가니 주위 사람들이 좀 놀랐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응모자의 국내 출신 학부보다는 전공 분야의 학위 논문, 지도교수의 추천서, 그리고 당시 텍사스대학교 언어학 분야의 세계적 명성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됩니다. 이화여대에서 30년 가까이(29년 6개월) 근무하고 정년퇴직하였습니다. 이화여대에서의 교수 생활은 즐거웠습니다. 학생들도 똑똑하고 캠퍼스도 정감이 있고.

전공인 통사론이 어떤 학문인지요?

통사론은 쉽게 말하면 ‘문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문법’과 같은 학교문법이 아니라 ‘보편문법’이란 개념입니다. 인간이 말을 한다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어휘를 조합하여 언어적 표현(문장)을 만들어 발성기관을 통해 밖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머릿속에는 어휘사전이 있고 거기에 있는 어휘를 조합하여 언어적 표현을 만들어 의사를 표현합니다.

그러한 언어적 표현은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법칙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그 언어적 표현을 만드는 머릿속의 법칙이 바로 문법입니다. 언어가 인간 공통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한다면, 서로 다른 개별 언어(한국어, 영어 등)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도 본질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문법, 즉 보편문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보편문법을 연구하면 인간의 정신적 특성도 알아낼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바로 통사론(보편문법)이란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심리학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세계적 언어학자 촘스키(Chomsky)에 따르면, 보편문법은 생물학의 한 분야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특성을 밝히는 심리학, 생물학뿐만 아니라 AI(인공지능)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다만 다른 인문학이나 예술 등의 분야와 달리 대중성(?)이 없어 일반 사람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기는 좀 어렵습니다(웃음).

교수로 근무하시면서 즐거운 추억 이나 힘들었던 추억은 무엇인지요?

특별히 힘들었던 기억은 없습니다. 가르치는 직업 자체가 좋았습니다. ‘선생이라는 직업이 없었으면 나는 굶어 죽었을 거다.’라고 농반진반으로 말합니다(웃음). 초등학교 교사를 시작할 때부터 ‘교실에 들어갈 때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가벼운 흥분을 느끼지 못하면 선생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었습니다만 교사와 학생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함께 하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그 ‘흥분(설렘)’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고부터는 교실 출입문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그 설렘이 느껴지더군요. 교수 정년퇴직 시까지 가르치는 일이 늘 즐거웠습니다. 큰 보람을 느끼는 직업이었어요.

가르치는 일이 즐겁다고 하셨는데 계속하실 생각이 없으신지요?

통사론은 일반인에게 가르치기는 힘든 분야입니다. 일반인에게는 아마 재미도 없을 것이고요(웃음). 다만 통사론 전공 학자로서 자녀교육과 관련하여 느낀 점을 알려줄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1시간 정도라면 말입니다(웃음). 특히 자녀의 영어교육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년퇴직하고 나서 한때는 영어 가르치는 봉사 활동을 고려해 보았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했습니다.

고향과 관련하여 혹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서울의 서쪽에 사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열차, 특히 고속열차가 서울역에서 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여건상 전면적으로 시행하기 어렵다면 새벽에 출발하는 첫 열차만이라도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열차 이용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풍기인삼엑스포가 개최되기 전 중앙선이 지나는 지역의 지자체장과 국회의원들이 서울역에서 중앙선 열차가 출발할 수 있도록 힘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퇴임 후에 고향에서 봉사하는 삶을 머릿속에 그려본 적이 있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접었습니다. 고향은 늘 그리운 곳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고향에 가서 살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이제 몸도 마음도 점점 늙어가니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고향 마을은 사람도 풍경도 바뀌어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동구 밖 느티나무, 그 아래 둥글게 쌓은 단 위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고,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회의도 하던 그런 모습은 이제 모두 사라졌습니다. 단오 때 그네를 매어 뛰던 그 크고 오래된 느티나무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방학 때마다, 안동교대 다닐 때는 1~2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오느라 열차를 이용했는데, 그 열차가 다니던 문수역사의 쓸쓸한 모습이 왠지 눈시울을 뜨겁게 하더군요.


박승혁 이화여대 명예교수 프로필
- (현)이화여대 명예교수
- 문수면 권선리 고랑골 출생
- 문수초등학교 졸업, 대구 경상중, 대구고 졸업
- 안동교대 졸업, 영남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경북대 교육대학원(교육학석사), 영남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문학석사)
- 텍사스대학교(오스틴)(언어학 석사, 언어학박사)
- (전)부산여대(현 신라대)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
- (전)이화여대 인문대 영어영문학부 교수. 통역번역대학원장 등 역임.

- 저서:『최소주의문법론』 외 통사론 및 영어학 분야 논문 다수.
- 상훈: 황조근정훈장.

황재천(프리랜서) 기자 / 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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