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인생을 살고 나서 남는 것으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은 덕행[立德]과 말[立言]과 공업[立功]이다. 이를 가리켜 세 가지 썩지 않는 ‘삼불후(三不朽)’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서 말해보자면 명예, 즉 이름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생은 이름 하나 남기려고 그 숱한 고통과 눈물, 땀을 투입하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름을 어디에 남겨 전할까? 어떤 사람들은 책에다 남기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돌에다 새겨서 남기려고 한다. 그렇지만 가장 좋은 것은 책도 아니고 돌도 아닌 사람의 입 비석[口碑]이 가장 좋다고 하겠다. 『명심보감』에서는 ‘큰 이름을 어찌 쓸모없는 돌에다 새길 필요가 있겠는가?

길 다니는 사람의 입이 비석을 이기네.[大名豈有鐫頑石.路上行人口勝碑]’라고 하여 송나라의 상수학자(象數學者)로 유명한 안락선생 소옹(邵雍:1011-1077)의 격양시(擊壤詩)로 전해지고 있으나 송나라의 저명한 고승인 보제선사(普濟禪師)의 『五燈會元·寶峰文禪師法嗣』에는 ‘그대에게 권하노니 쓸모없는 돌에 이름을 새길 필요가 없다네. 길 다니는 사람의 입이 비석과 같다네. [勸君不用鐫頑石.路上行人口似碑]’라고 전해지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구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말기 마지막 한문학 사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1852-1898)이 남도 기행 길에 나서서 가야산 아래 해인사를 들렀을 때 지은 ‘홍류동에서 장난삼아 짓는다.’라는 「홍류동희제(紅流洞戲題)」의 두 편 가운데 두 번째 작품도 이를 증명하고 있다.

大書深刻競纍纍(대서심각경루루) 다투어 얼기설기 큰 글씨로 깊이 새겼는데
石泐苔塡誰復知(석륵태전수부지) 돌 결 일어나고 이끼 채워지면 누가 다시 알랴?
 一字不題崔致遠(일자부제최치원) 그 옛날 최치원은 한 글자도 쓰지 않았지만
至今人誦七言詩(지금인송칠언시) 지금까지 사람들이 칠언시를 외운다네.

명미당 이건창은 이 시에서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 십리 길에 펼쳐지는 절경인 홍류동(紅流洞)을 걷다가 기암괴석에 빼곡하게 덕지덕지 새겨진 이름 모를 고인들의 이름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며 시를 지었던 것이다. 저렇게 자연을 훼손해가면서까지 이름을 남겨야 하는가? 아무리 명예욕이 크다고 하지만 한번 훼손하면 다시는 복원이 불가능한 바위에다 그런 이름을 새겨본들 후세에 누가 알아주겠는가? 이것은 부질없는 욕심에 불과하다.

차라리 바위에 이름 한 글자도 새기지 않은 최치원은 그가 이곳 홍류동으로 들어와 지었던 「제가야산독서당」이란 시를 남겨서 지금까지 사람들이 암송하고 있다라는 언급을 통해 이름은 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위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고자 했던 그 사람들은 훗날 이건창이 와서 이렇게 준엄하게 꾸짖을 줄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를 보면서 우리도 우리 이름을 어디에 남겨야 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자연물인 바위를 훼손해가면서까지 이름을 새겨두어 두고두고 비난받기보다 삼불후(三不朽)를 실천하여 사람의 입에다 이름을 새겨두면 길이길이 칭송받으며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렇다면 삼불후의 몸소 실천이라는 뒷받침으로 천추방명(千秋芳名)을 남겨야지 부질없는 명예욕으로 천고오명(千古汚名)을 둘러써서야 되겠는가?

이름은 본인의 피나는 노력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따라오는 것이어야지 노력의 투입이 없는 헛된 욕망의 불로소득을 노린다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처참한 결과를 끝내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택은 우리들의 몫이다. 돌에 새길 것인가? 입에 올릴 것인가?

참고로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 후 신라로 귀국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치려고 하다가 신분적인 한계와 기득권들의 반대에 부딪혀 개혁이 좌절된 후 부산의 해운대와 마산의 월영대를 거쳐 마지막으로 가야산으로 숨어들었을 때 지은 시를 소개한다.

「題伽倻山讀書堂(제가야산독서당)」 가야산 독서당에 쓰다.
狂噴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첩첩한 바위 사이 미친 듯 내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사람의 말소리를 지척에서도 알아듣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늘 옳으니 그르니 다투는 세상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짐짓 흘러가는 물로 온 산을 둘러싸게 하였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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