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율 (동양대학교 교수)
선비가 지켜야 할 덕목 가운데 출처(出處)라는 것이 있다. 쉽게 말해 ‘출’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세(出世)이고 ‘처’는 세상에서 물러나는 퇴처(退處)이다. 그런데 ‘출’도 어려운 일이지만 ‘처’는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출’에서도 왕왕 생기는 경우가 있으나 항상 ‘처’에서 생긴다. 언제가 ‘처’할 때인지를 모르고 욕심을 부려서 ‘처’할 기회를 놓치게 되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 9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공을 이루고 명예를 완수하면 몸이 물러나는 것은 하늘의 도다(功成名遂,身退,天之道)’라고. 지금까지 무수한 칼럼이나 강연, 수필 등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이다. 그것은 그만큼 이 명제가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라는 반증(反證)일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를 더듬어보면 이 명제가 실천되지 않으면 거의 어김없이 불행한 결말로 귀결되는 경우를 볼 수가 있다.
특히 중국 역사를 보면 이를 제대로 실천한 인물로 춘추 시대의 범려(范蠡), 한나라의 장량(張良)를 들 수가 있고 그와 반대로 이를 실천하지 않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은 사람으로는 춘추 시대의 문종(文種), 진나라의 이사(李斯), 한나라의 한신(韓信) 등을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의 생애를 간략히 살펴보면 앞서 노자가 도덕경에서 언급한 말의 무게를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먼저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의 경우를 보면 두 사람 다 섶에 눕고 쓸개를 맛본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에서 ‘상담(嘗膽)’으로 유명한 월나라 구천(句踐)을 도와 오나라 부차(夫差)를 멸망시키고 패권(霸權)을 쥐게 만든 사람들이다. 문제는 구천이 패권을 쥔 이후의 처신에서 두 사람은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범려는 ‘공이 많으면 화가 뒤따른다.’라고 하며 구천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갔으나 문종은 생각이 달라 계속 구천 곁에 머무르려고 한다. 마침내 범려는 떠나면서 문종에게 빨리 떠나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남긴다.
그 편지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토사구팽(兎死狗烹) 고사의 유래가 담겨 있다. 바로 ‘나는 새가 다 없어지니 좋은 활이 감춰지고 교활한 토끼가 다 죽으니 달리는 사냥개를 삶는다. 월나라 왕은 그 관상이 기다란 목에다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한 입을 하고 있어서 참을성이 많아 환난은 함께 할 수가 있으나 잔인하고 욕심이 많으며 의심이 많아 안락은 같이 즐길 수가 없으니 자네는 어찌 떠나지 아니하는가?(蜚鳥盡,良弓藏.狡兎死,走狗烹.越王爲人,長頸烏喙,可與共患難,不可與共樂.子何不去?)’라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떠날 시기를 놓친 문종은 결국 구천으로부터 ‘오나라를 정벌하는 칠술[伐吳七術] 가운데 자기가 삼술(三術)을 써서 오(吳)를 멸망시켰으니 나머지 자네에게 있는 사술(四術)은 나를 위해 선왕 합려(闔閭)를 따라 시험’하라고 하며 내린 촉루검(髑髏劍)을 받고 자결하기에 이른다. 범려는 제나라로 가서 성명을 변경하여 치이자피(鴟夷子皮)라 하고 다시 도(陶)로 가서는 도주공(陶朱公)이라 이름하고 많은 부를 축적하여 상업의 시조[商祖]로 불린다.
그런데 이 말은 훗날 한신이 죽임을 당할 때 역시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본래 이 말은 한신이 한 말이 아니라 범려의 말을 인용한 것이고 한신은 거기에다 한 마디만 덧붙인다. 바로 ‘내가 진실로 삶는 경우를 당하였다.(我固當烹)’라고.
다음은 한(漢)나라의 장량(張良)과 한신(韓信), 그리고 진나라의 이사(李斯)의 경우를 보자. 장량은 대대로 한(韓)나라의 재상을 지낸 집안이었으나 진나라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이 한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진나라에 복수를 하려고 박랑사(博浪沙)에서 진시황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성명을 바꾸고 몸을 숨겼다가 훗날 유방(劉邦)에게 의탁하여 결국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하고 유방을 황제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 황포산(黃袍山)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 한신은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한나라 건국에 크게 이바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야심을 숨기지 않고 물러나지 않았다가 마침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는 일반천금(一飯千金), 다다익선(多多益善), 국사무쌍(國士無雙) 등 수많은 고사를 양산한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였으나 역시 처신의 잘못으로 앞서 말한 문종과 같은 전철(前轍)을 밟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진나라 객경(客卿) 이사(李斯)의 경우를 보자. 이사는 본래 진나라 사람이 아니고 초(楚)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순자(荀子)의 제자였다. 출세를 위해 나중에 진나라로 들어가 재상까지 되었으나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료였던 한비자(韓非子)를 이용하다가 죽게 만든 비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결국 만족할 줄을 모르고 끝까지 욕심을 부리며 물러나지 않다가 마지막에는 반역의 누명을 쓰고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서 허리가 잘려 죽는 요참(腰斬)을 당하고 삼족까지 멸족(滅族)되는 비극을 맞았다.
이상의 사례에서 보듯이 공과 명예를 이루고 몸이 물러나지 않아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경우는 수없이 많다. 다시 말하면 출처를 시의(時宜)에 맞게 실천하지 않으면 뜻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많은 경우를 볼 수 있고 가장 최근의 대한민국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사람 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앞으로도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사소한 이야기 같아서 별로 괘념(掛念)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원칙을 지키지 않을 적에는 심각한 상황을 계속 맞이할 것이다. 누구도 이 원칙에서 예외일 수 없음을 명심하고 범려와 장량의 처신을 깊이깊이 새겨서 반드시 자기 행동으로 옮겨볼 일이다. 문제는 바둑을 두는 것처럼 훈수는 잘 둘 수 있으나 막상 자기가 바둑판을 차지하고 앉으면 수가 막막하여 판을 그르치기가 쉽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