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새마을 깃발 ‘르완다의 새로운 역사를 쓰다’

에디오피아 현지 마을 주민들과(2017.12)
에디오피아 현지 마을 주민들과(2017.12)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영주시청서 공직생활 시작, 명예퇴직 후 지구촌 활동
창세기 이래 첫 시도 무심바 마을의 논농사 ‘성공’ 보람
유치원, 마을금고, 상수도 시설도 건설...‘자립심 키워 줘’

“농기계가 없어도 희망으로 시작해 기적을 이룬 우리나라의 근대사가 이제 르완다 무심바 마을 사람들의 가슴으로 이어져 꽃을 피우니 자랑스럽습니다. 그들의 건강과 평온을 기원합니다”

르완다 무심바 마을은 2013년 사상 처음으로 논농사를 시작했다.

그 때까지 르완다 공항에서 무심바 마을에 가기까지 벼가 자라는 논이 하나도 없었다.

그곳에서 권오영 박사가 이끄는 팀이 처음으로 르완다 국민의 주식인 쌀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코이카 소속으로 한국의 새마을운동의 해외 사업으로 시도한 사업 중의 하나가 쌀농사였다. 그의 팀이 시작한 쌀농사를 시작하기 까지 르완다는 주식은 쌀이었지만 90% 이상을 수입했다.

영주시 시골마을에서 어렸을 적 어른들의 논농사를 돕기도 했지만 한국과 르완다의 환경은 너무 달랐다. 자연환경의 차이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70년대처럼 사람의 힘을 대신하는 농기계도 없었다. 논을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는 농기계는 말 그대로 곡괭이 한 자루였다. 모든 사람에게 연장이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제3기새마을리더 해외봉사단 평가보고회 및 해단식(2013.10)
제3기새마을리더 해외봉사단 평가보고회 및 해단식(2013.10)

르완다의 새로운 역사가 된 ‘벼농사’ 보급 신화

권 박사가 이끄는 팀이 주민 43명과 함께 처음으로 논 2.3㏊를 개간해 쌀 4천286㎏을 수확했다. 그 후 18㏊를 개간해 논을 늘렸다. 처음 논농사를 시작할 때 방관자이던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논을 개간하고 논농사를 짓는데 참여하는 인원도 대폭 늘었다. 인근 4개 마을 사람들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했다. 논농사를 지어 본 사람과 경험 없는 사람을 함께 일하도록 조를 만들어 농사기술이 자연스레 전수되도록 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일하며 종족 분쟁의 상처도 치유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쌀을 팔아 얻은 수입 중 20%는 각자 분배를 하고 벼조합공동기금으로 나머지 수입을 적립토록 했다. 권 박사는 주민들이 모를 제대로 심을 수 있도록 직접 못줄도 만들었다. 권 박사는 현지에서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볍씨 소독, 물관리, 모내기, 해충 구제 등 노하우를 정리해서 자료로 전달했다.

그가 시도한 벼농사는 인근 학교 학생들의 현장 견학 코스가 됐다. 권 박사는 “벼농사가 이제 무심바 마을과 르완다의 새로운 역사가 된 듯 하다”며 “가장 흐뭇한 것은 외부 지원이 없이도 이제 주민들 스스로 벼농사 면적을 몇 십 배 늘리고 농사를 지어 생산량을 높인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유치원. 유치원 복장이 한국의 새마을운동 깃발에서 따왔다
유치원. 유치원 복장이 한국의 새마을운동 깃발에서 따왔다

종족분쟁으로 100만명이 희생된 르완다

종족 분쟁으로 100만 명이 넘게 희생됐던 르완다. 아프리카 르완다는 매년 4월 8일부터 일주일간이 추모주간이다. 이날부터 일주일간 이 나라의 아픈 역사를 추모하는 기간이다. 1994년 종족 간의 분쟁으로 100만 명이 넘게 무참하게 희생됐다. 권 박사가 2013년 르완다 남부주 기타라마 시청 주관 추모식에 초청받아 참석했을 때 종족간의 분쟁의 흔적이 한국의 동족상잔을 떠올리게 했다.

마을회관 국기도 조기로 달았다. 액자 사진에는 당시 희생된 사람들이 보였다. 액자 밑과 뒤에는 나무관이 있고 유골들이 담겨 있었다. 추모식에서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하자 추모식은 울음바다가 됐다.

일주일 추모기간 동안 대중교통은 오전만 운행하고 오후는 추모행사가 이어지고 상가는 일주일 내내 문을 열지 않았다. 지구상 어떤 곳에서도 다시는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한다고 권박사는 말한다.

권 박사에게 추모행사는 종족간의 분쟁이 다시 발생하지 않고 서로 힘을 합쳐 살아나가도록 새마을운동 정신을 심어야겠다는 다짐의 시간이기도 했다.

현지에 개척한 논농사 견학을 위해 방문한 학생들(2012)
현지에 개척한 논농사 견학을 위해 방문한 학생들(2012)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고향

영주시 부석면 감곡리 석남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한 때 70여 호이던 마을이며 지금은 30여 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다. 권 박사는 이곳이 고향이다. 고향에서 엄한 어른들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가정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어른들이 자녀를 키웠기 때문이다.

권 박사의 아프리카 봉사활동은 어른들의 훈육과 관련이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 상석초교, 영광중, 영광고를 졸업한 후 영주시청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영주시청에서 영주시청사 건립, 폴리텍대학 부지 조성의 업무를 하다 경북도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7년부터 2011년 경북도청에서 독도수호대책과장, 노인복지과장, 수산진흥과장을 역임 후 명예퇴직을 할 때까지 30여년의 공직 생활을 했다. 퇴직 후 바로 지구촌 차원의 활동을 시작했다.

공직 생활을 기려 받은 홍조근정훈장도 르완다를 다녀와서야 받았다. 그의 지구촌 활동은 새마을운동의 아프리카 접목이었다. 그는 르완다 후보지 4곳 중 한 곳인 무심바 마을로 떠난 날은 퇴직 바로 다음 날이었다.

현지 주민들로부터 얻은 르완다 이름 ‘만지’

르완다 무심바 마을은 적도 아래 해발 1,800m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한국에서 살 때와는 여러 가지가 완연히 달랐다. 이곳에서 쌀농사를 시도하면서 그의 팀은 유치원도 지었다. 처음엔 탁아소 개념이었던 걸 유치원으로 바꾸고 제대로 지었다. 르완다의 미래가 밝으려면 교육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의 팀이 지은 유치원은 르완다에서 유일하게 주민이 운영주체인 교육부 인정 유치원이다. 코이카 단원들이 떠난 후에도 주민들이 스스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유치원 건물과 기본 기자재만 지원하고, 모든 운영은 마을 주민 5명으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서 운영토록 했다. 교사봉급과 아이들 간식 까지도 스스로 하도록 했다. 그 유치원이 학생들이 증가해 현재는 지원자를 다 받지 못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마을금고도 르완다에서 유일하다. 마을금고는 무심바 마을 주민들이 자립하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마을 주민들이 생산하는 각종 농산물은 마을 도로변에 설치한 구판장에서 판매를 하며 소득이 되고 있다. 2013년에는 상수도 공사를 완공했다. 물을 기르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하는 불편이 사라졌다.

그는 현지 사람들과 부대끼며 생활하면서 현지인들과 거리감을 좁히고자 노력했다. 현지인들을 인간적으로 존중하면서 그들 사이에 녹아들려고 했다. 그는 현지 주민들로부터 르완다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그의 르완다 이름은 ‘만지’이다. 그가 팀장으로 이룬 이러한 활동이 현지 언론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벼농사, 유치원, 마을금고가 이제 무심바 마을과 르완다의 새로운 역사가 된듯합니다.” 권오영 박사의 말이다.

지구촌 어려운 마을 찾아 마을개발 5개년 계획 마련, 새마을운동 추진

권 박사가 태어난 고향집, 고향집에서 보이는 국망봉, 르완다 무심바 마을 집에서 보이는 카르심비봉은 권 박사에게 가슴에 자리 잡은 그리운 곳이다. 세상에 태어나 대한민국 국민의 자부심으로 어려운 환경을 개척했던 르완다 경험은 정말 잊지 못할 인생의 보람이며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지구촌 활동을 이어가고자 한다. 라오스 2개 마을, 캄보디아 3개 마을, 에티오피아 1개 마을, 스리랑카 3개 마을, 캄보디아 3개 마을에 대해 현지 확인 등을 하며 마을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어 줬다. 어려운 삶을 사는 나라에 도움이 되고자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고 있는 중이다.

2017년 아프리카 발전을 위해 큰 기대로 시작한 사업이 중도에 중단되는 아픔도 겪었다. 칠곡군과 함께 에디오피아 현지를 답사하고 5개년 개발계획을 세워 에디오피아 최고의 마을개발 사례를 만들고자 했다. 중도에 에디오피아 나라 사정으로 ‘아라토 마을회관’ 준공을 끝으로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다. 이런 아픔도 그에게 좌절 보다는 새로운 힘을 주는 듯 보인다.

글로벌 활동을 하면서도 한국의 뿌리 중시

그가 옛 전통을 잇는 모습은 도포를 입은 모습에서도 보인다. 문중의 제임(일을 맡은 사람)을 맡아 생명을 준 조상께 감사하고 친척들의 화목을 도모한다. 소수서원과 금성단의 제임도 역임했다. 소수서원은 회헌 안향 선생을 기리고 본받기 위해 세운 학교이다. 금성단은 단종을 위한 활동을 하다 비명에 간 사람들을 기리는 곳으로 골육상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죄 없이 죽은 민초들의 넋을 위로하는 곳이다.

두 곳 모두 선비 정신을 잇는 곳으로 권 박사의 공직 생활을 통해 더 나은 공동체 삶을 위한 활동과 지구촌 차원의 활동도 이와 관련돼 있다. 선비들의 정신이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한다. 지금 시대에 맞는 실천적 확산이 가능함에도 그 정신을 중간에서 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기자가 보기에 그는 이미 선비정신을 실천을 하는 사람임에도 스스로에 대해 겸양을 한다. 르완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지인들이 한국에서 보내주는 반찬을 받을 때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란 걸 깨달았다고 한다.

고향 사랑 모임 결성, 그 맥이 잇다

팔공산 자락에서 농사를 짓는 땅은 권 박사의 놀이터이다. 권 박사는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채소 등 씨앗을 구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을 받는지라 우리나라의 새로운 먹거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봄부터 가을까지 바쁘다. 팔공산 자락에 있는 밭에 가기 때문이다. 그는 밭을 놀이터라고 부른다.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하지 않고 놀이터에서 논다고 한다. 다종다양한 씨앗을 파종하고 크는 모습을 관찰하고 수확을 한다. 수확을 한 후에는 직접 요리를 한다. 그가 우리나라에 들여와 키운 새 농작물은 여러 사람들에게 씨앗이 나뉘어져 자라고 있다.

그는 80년대 초반 경북도청에 근무하면서 영주출신들로 도청영주향우회를 만들어 총무만 15년, 회장을 10년 동안 역임했다. 회장에 취임하고 도교육청, 도경찰청 근무 향우들도 함께 하는 영우회를 결성해 경상북도의 발전과 고향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마음을 모았다.

경북도청이 대구에 소재할 때, 대구 거주 영주 출신 기관장 모임도 만들어 지방의 쇠락을 걱정하기도 했다. 영주시와 출향인들이 함께 고향의 발전을 모색하면 고향의 좋은 발전 방안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본다.

권오영 박사 프로필
-상석초등학교, 영광중학교, 영광고등학교
-경북대학교 행정학 석사
-동양대학교 경영정보학 박사
-경상북도 도청 부이사관(독도정책과장, 노인복지과장, 수산진흥과장)
-국제새마을운동연구소 연구위원
-행정안전부 지구촌새마을운동 자문위원
-새마을세계화재단 자문위원
-KOICA 한국국제협력단 소속으로 르완다 무심바마을 새마을프로젝트 수행

황재천(프리랜서) 기자 / 오공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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