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 (시조시인, 본지 논설위원)
혼자만의 행복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더불어 행복하려면, 먼저 스스로의 고통부터 해소해야 합니다. 자신의 고통은 거의 내 탓이긴 해도 우리는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에 이미 익숙해져 있습니다. 가진 게 없어도 남을 도울 수 있고 베풀 수 있다는 것을 불가에서는 “無財七施”로 가르칩니다. 일곱 가지 마음으로 베풂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뜻한 마음만으로 가능하지요.
우리들이 겪는 고통의 뿌리는 탐진치(貪瞋痴;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탐욕은 남을 해칠 수도 있는 공격행위이고, 성냄은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 행위이며, 어리석음은 무방비 상태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고통을 줄이거나 헤어나려면 탐욕을 베풂으로, 성냄을 평온으로,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어야 합니다. 베풂은 남에게 물질과 마음을 조건 없이 주는 물리적 행위이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절제행위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베풂은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베풀면서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기에, 베푼다는 마음을 몸에 표시를 내면 안 됩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어떻게 해주었는데 나에게 그럴 수 있어’라는 원망이 깃든다면 그건 베푼 게 아닙니다. 베풂은 물리적인 건네줌이 있었다고 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살이에서 역사 교훈 외에는 서로의 과거를 알려고 하면 안 됩니다. 과거는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시공일 뿐이니까요. 기분 나빴던 과거로 돌아가지도 말고 상대의 기분 나쁜 말 때문에 에너지를 뺏기지 말아야지요. 과거 일로 기분이 상하면 바로 잊었다고 외치고, 더 큰 자유를 위해 아픈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는 게 행복의 출발이 됩니다.
성냄은 잔망스런 마음의 작품으로 고통을 보탤 뿐입니다. 성냄은 상대의 공격에 대한 응전(應戰) 행위로 미운 상대를 깨려고 하다가 마침내 자기를 불태웁니다. 상대가 무심결에 던진 말에 불쾌감을 느끼고 무시당했다고 해석하면 그 화와 분노감이 오래가지요. 화의 불씨를 바로 끄지 못하면 화가 화의 심지를 키우고 울화로 인한 화병을 키울 수 있습니다. 누가 건드린다고 바로 성내지 말아야지요.
성냄은 몸에 독을 만들고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기를 칭찬하고 고무시키는 천사보다 시비를 걸고 물어뜯으려는 악마들이 우글거립니다. 인정과 사랑받고 싶은 생각마저 놓아버리고, 긴 호흡으로 평온을 유지하여 몸에 독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냄과 평온은 그 에너지가 똑같습니다. 성냄은 자기 밖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고, 평온은 안에서 자기를 밝게 빛내는 것이지요. 성질(性質)을 자주 내면 두뇌에 잔주름이 생긴다고 하네요. 불편하고 부당한 것들을 평온함으로 다스리면 그 주름이 근육으로 바뀌어 스스로를 강하게 조련해서 내공이 깊어진다고 합니다.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면 어리석다고 합니다. 어리석음은 불필요한 고통에 스스로를 빠트립니다. 몰라서 어리석어지는 것보다 이해와 아량 부족으로 아둔해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잘나서 겉도는 어리석음이 인류를 혼란에 빠트렸고, 작은 지식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단죄하려고 덤비는 게 국정혼란의 원인입니다.
부지깽이에 금칠을 해도 근본은 부지깽이입니다. 정의의 칼처럼 보여도 공명심이 숨어 있고 권력을 탐하고 이익을 좇는다면 이 또한 부지깽이에 불과하겠지요. 과거의 역사는 승자에게 불편한 진실을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기업의 회계장부는 정직하게 기록하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불편한 진실은 어디에도 있습니다.
관행으로 이루어진 일에 도덕의 옷을 입히면 다수의 자존감이 상하고, 불편한 과거 진실을 끌고 와서 현재를 평정하는 것도 야수의 짓이 됩니다. 작금의 우리나라는 세종 임금이 부활해서 통치를 한다 해도 과반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태라는 우스개가 있습니다.
그만큼 세대 간, 지역 간 남녀 간 생각이 다르고 빈부격차가 크며, 사상과 이념이 뒤섞여 있단 지적이겠지요. 그러므로 지금의 고통을 해소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리석었다는 반성으로 사랑을 베풀고, 마음을 평온하게 다스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