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 (소설가·본지논설위원)
한 때, 홍콩에서 제작한 무술영화가 흥행한 적이 있다. 총이 등장하는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달리 주인공이 맨손이거나 검 같은 간단한 도구를 들고, 새처럼 허공을 날 듯 연기하는 무술영화를 보던 재미가 새삼 기억난다.
버거운 상대로 보여 마음이 조마조마한데도, 어려운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악인을 발아래에 쓰러뜨리는 통쾌한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무술영화라고 하면 이내 배우 브루스 리, 이소룡(李小龍)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무술영화에서 이소룡을 능가하는 연기자는 없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이소룡은 자그마하고 야무진 체격으로서 미남형의 외모는 아니다.
하지만 부르스 리가 은막에서 펼치는 열연을 보면 옛 얘기에 나오는 도술부리는 기인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몸놀림과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작은 용이라는 이름처럼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활약한 이소룡의 본 이름은 이진번(李振藩)이다. 많은 자녀를 둔 아버지는 영화를 사랑하는 경극배우였고, 어머니는 중국인과 백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 여성이다. 이소룡이 태어나자 알고 지내던 글로버 박사는 ‘브루스(Bruce)’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어머니는 영어 이름을 준비하지 않은데다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브루스 리’를 받아들였다.
생후 3개월 무렵, 영화감독인 아버지의 친구가 진번을 『금문녀』라는 영화에 출연시켜 영아시절에 영화계에 첫선을 보였다. 뒷날 『당산대형』, 『사망유희』, 『정무문』, 『맹룡과강』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공중으로 날렵하게 솟아올라 발과 주먹으로 공격하는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펼쳐 무술 액션배우로서 영화 팬들의 우상이 되었다.
등나무줄기가 박힌 듯 근육형의 몸매에 분노와 증오를 넘어 슬픔이 북받치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일결을 가하는 모습은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그만의 독특한 이미지이다.
울음을 쏟을 것 같은 비감 어린 표정에는 악에 대한 분노와 이를 척결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바람소리가 날 만큼 재빠르게 휘둘러 대는 절권도 무술은 그가 창안한 독창적인 무예이다. 불의에 맞서는 주인공의 속마음을 선명하게 연기하여 무술영화의 수준을 한 차원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서른두 살에 뇌질환으로 생을 마감하여 은막의 영상으로 볼 뿐 무술영화의 전설 이소룡은 팬들의 곁을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무술연기의 독보적인 배우 이소룡도 스무 살 무렵에 품행이 바르지는 않았다. 하는 일 없이 아가씨들과 노닥거렸고 싸움을 하여 몸을 다치기도 한다. 이를테면 건달이었다. 마약 범죄조직에 연루된 친구를 구하려다 감옥에 가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쌈박질을 하고 건달생활로 세월을 보낼 무렵, 사고뭉치 아들을 두고 가슴 아파하고 속을 썩인 이는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집을 자주 비웠기 때문에 말썽을 부리는 자녀를 어머니가 도맡아야 했다.
어머니는 잘못을 저지른 아들딸을 훈육하는 방법으로 집 안 한쪽의 조상을 모시는 단 앞에서 절을 시켰다. 밤늦게 귀가하거나 말썽을 일으키고 돌아왔을 때에도 조상에게 경건하게 절을 올리게 했다. 조상신을 모시는 방을 마련해 놓고 과일과 음식을 진설해 놓았는데 우리의 사당과 흡사했다. 신주를 모신 사당이 집 바깥에 별채로 있는데 반해 실내에 모시는 것이 달랐다.
가끔씩은 저지른 과오를 두고 어머니에게 몇 번 절을 하겠다고 말하고 조상을 모신 방에 가서 배례를 올렸다. 이소룡이 바른 길로 들어선 것은 어머니의 훈계뿐만 아니라 두 번 다시 말썽을 부리지 않겠다고 조상 앞에서 배례로써 다짐하여 자신을 다스린 탓일 것이다. 아마 그게 틀림없다.
조상 앞에 서면 숙연한 감정을 가질 것이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조상의 혼령 앞에서 언행을 반성하면 옹골진 실천 의지는 저절로 생긴다. 조상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새 생활을 다짐하여 비유적으로 하늘에 맹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조상에게 부끄러운 후손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손바닥 뒤집듯 어길 수는 없다. 못난 후손일지라도 조상에게 감히 위선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일 터이다.
지구촌 유교문화(儒敎文化)의 본거지는 우리나라이다. 중국은 유물론의 사회주의에 집착하여 유교를 버렸다. 모택동이 홍위병을 앞세워 문화혁명을 전개할 때, 유교를 봉건적인 낡은 부르주아 사상의 잔재라고 비판하면서 유적과 유물을 파괴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안향선생과 소수서원의 고장 영주 동양대학교에는 유학(儒學)을 연구하고자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다수 있다. 선비의 근원, 우리 고장이 유교문화를 주도적으로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영주시가 지난 10일부터 사흘 동안 ‘포스트코로나 시대, 인성에서 길을 찾다’라는 주제로 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한 ‘제3회 세계 인성포럼’ 행사가 코로나 이후 시대의 길잡이가 될 것으로 믿는다. 전통윤리를 실행하는 바른 인성이 행복한 개인, 행복한 사회를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