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시조 시인. 본지 논설위원)

기사 하나를 읽었다. 버스를 탄 젊은이가 주머니에 차비가 없음을 뒤늦게 알고 당황한 나머지 버스 기사에게 사정을 말하면서 자기를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달라고 했다. 사정을 들은 버스 기사는 그냥 가자고 했다.

덕분에 그는 무사히 목적지까지 갔다. 그 후, 청년은 자기 영업장에서 취급하는 음료수와 이천 원이 조금 넘는 버스요금을 전달하고자 해당 운수회사를 찾았다. 마침 기사분이 자리를 비워 사무실 동료들에게 사연을 전달했다.

대충 이러한 사연인데 읽으면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기사로 읽고 나서도 한동안 가슴이 훈훈했다. 훈훈하기로 말하자면 버스 기사분도, 상황을 전해들은 회사 동료들도, 글을 읽는 독자도 모두 같겠지만 제일 기분 좋은 사람은 아마도 본인일 것이다. 가슴 한편에 자리 잡았던 감사함과 죄송함을 내려놓으면서 비로소 할 일을 했다는 후련함을 느꼈을 테다. 은혜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갚아야 마음이 가벼워지는 법이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로 남아 있는 오래된 옛일이 다시 생각난다. 큰아이 대학 입시 날이었다. 서울내왕을 자주 해보지 못한 처지에, 종로구 혜화동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 갔다. 시골 사람이니 하루 전날 학교 근처에 숙소를 마련해야 하는데 수험생들로 여관이 동이 나서 부동산중개소에 부탁해 하늘의 별을 따듯이 어렵게 민가를 구해 일박했다.

입실시간을 계산해서 일어나보니 바깥이 아직 어둑어둑하고 바람 소리가 매섭게 들렸다.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된듯했다. 딸이 보는 시험이지만 첫 대입시험이라 떨리고, 겨울이라 떨리고, 무엇보다 촌사람이라 서울 물정이 서툴러 떨리는데 날씨까지 추위가 나서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전날 답사한 길로 시험장을 찾아가는 골목길은 수험생과 학부모와 자동차로 뒤엉켜 빽빽이 채워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차가 없는 사람은 종종 뛰고 있었다. 그런데 구름 낀 하늘에서 때 아닌 비가 내리는 것이다. 입시 추위에 우산도 없는데 비라니……. 택시도 잡을 수 없고 비를 맞으며 시험장으로 가는 길이 우리가 서울 물정을 모르는 시골 사람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시험장건물은 보이지 않는데 바람에 날리는 비는 눈발까지 섞인 진눈깨비가 되어서 눈을 뜰 수 없으니 걸음이 늦어졌다. 시간 내에 입실이 될는지 불안에 떨면서 헐떡이며 가는데 뒤에서 천천히 오던 자가용이 우리 옆에 서는 것이다. 진로를 막았다는 생각에 비켜주려는데 창문을 내리고는 얼른 타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꿈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많은 사람 중에 어찌 우리였을까?

행운에 감사하면서 젖은 옷이 시트를 버릴까 봐 마음 놓고 푹 앉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너무도 감사해 차비를 열 배라도 드리려고 했으나 그분은 사양하며 묻지도 않고 교문 앞에서 내려주고는 천천히 사라졌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럽고, 말할 수 없이 감사해서 내릴 때 세 사람이 수없이 절만 하고는 그만 연락처를 물을 생각을 아무도 하지 못했다. 큰 실수였다.

아이가 합격하고 입학하는 날 하룻밤 묵었던 집은 찾아가서 방을 잘 썼노라고 감사 인사를 했는데, 구세주같이 나타나서 차를 태워주신 그분은 이름도 차번호도 아니 차 색깔조차 모르니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딸아이가 4년 공부를 하는 동안 수없이 그 고마운 분이 생각났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꼭 한번 만나고 싶었지만 찾을 만한 단초(端初)가 전혀 없어서 지금까지도 안타까운 마음만 갖고 있다.

가능한 방법이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래서 은혜를 갚거나 답례는 하는 것은 하는 쪽이 받는 쪽보다 즐거운 것이란 걸 안다. 이미 30여 년 전의 일인데도 우리 가족은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차를 타지 못한 경우를 가정하고 아찔한 결과를 상상하며 감사와 안타까움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배려를 은혜로 생각하고 보답한 그 젊은이가 진정으로 부럽다.

무임승차의 젊은이를 목적지까지 가도록 배려해 준 기사님이나 인생을 좌우하는 대입시험장에 조건 없이 수험생 가족을 데려다준 얼굴도 모르는 신사의 배려는 우리를 오래도록 미소 짓게 하고 한없이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준다. 배려를 입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듣는 이까지 가슴을 훈훈하게 데워 준다.

서민들은 이렇게 산다. 우리를 서로 기쁘게 하고, 서로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고, 얼굴에 미소 짓게 하는 이는 보통 사람들이다. 너무도 평범하고 어찌 보면 좀 적게 가진, 좀 낮은 지위의 이웃 사람들이다.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텔레비전만 켜면 우리를 웃게 해 주겠다고 선택해 달라는 사람들이 온통 제 자랑뿐이고 저 잘났다 외치며, 남의 잘못을 세세히 훑고, 남의 아픔을 물고 늘어지는 그런 치사하고 유치한 사람들이 아니라, 가끔은 추위 속에서 살고 어떤 때는 더위에 땀 흘리며 무언가 부족하고 허전한 사람들이 서로의 심정을 어루만지며 잔잔하게 웃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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