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 만든 국가 인사제도의 큰 줄기, 역사가 됐다

2017.6.30 영주선비포럼 참석 시
2017.6.30 영주선비포럼 참석 시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2020.1.16 평은리교 복설공사 공로패 수상
2020.1.16 평은리교 복설공사 공로패 수상

육아휴직·성과급제 등 도입, 연금제도도 개혁
소통과 추진력으로 여러 제도개혁 이뤄

김동극 전 인사혁신처장은 평은면 오운리에서 태어나 오운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 유학을 하느라 고향을 떠났지만 지금도 매월 고향을 방문한다.

서울에서 생활하던 작은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에서 유학했다.

당시는 서울 등 대도시에 일찍 이주해 터를 잡은 형제자매들이 고향에 있는 조카들을 불러 공부를 하게 하던 때이다.

그는 작은어머니에게 특히 고마움을 갖고 있다. 작은아버지는 당신의 조카이니 자기 슬하에 불러들일 수 있다지만 작은어머니는 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어머니는 마치 ‘친어머니’ 같았다 한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섭섭하실 수도 있지만 가끔 고향의 어머니는 ‘큰어머니’의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는 고향에 오면 어른들께 인사드리고 친구들을 만난다. 그가 만나는 친구들에는 학연이 없는 친구들이 많다. ‘영주 사람’이라는 것, 단 하나로 친구가 된 사람도 많다.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고 한다. 이해관계가 없이 만나는 친구들이고 고향에 대한 정을 더욱 깊게 하는 친구들이라 만나게 된다고 한다.

재직 시 업무의 특성상 고향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다고 겸손해 하지만 그의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받았다고 고향사람들은 말한다. 고향발전을 위한 제안에 극도로 말을 아끼지만 그의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볼 때 기대감을 품게 한다.

2017년 2월 영주국유림관리소 방문 시
2017년 2월 영주국유림관리소 방문 시

인사업무만 30년, 공직인사 전문가

‘정부에서 인사 분야 업무를 줄곧 담당한 공직 인사의 전문가’ 김동극 전 인사혁신처장을 말할 때 따라 다니는 말이다. 공직의 인사 업무만 30년 이상한 특이한 케이스이다. 군 생활도 공군에서 인사업무를 했으니 사회생활의 거의 전부가 공직의 인사업무였다. 행정고시(29회) 합격 후 잠깐의 정부기록보존소 근무 외에는 인사 분야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총무처 인사국 인사기획과 사무관, 중앙인사위원회 기획총괄과 서기관, 중앙인사위원회 인사정책과 과장, 급여정책과 과장, 중앙인사위원회 인사정책국 정책총괄과 과장,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인사관리행정관, 중앙인사위원회 성과후생국장, 행정안전부 성과후생국장, 행정안전부 인력개발관과 인사정책관, 박근혜정부 대통령비서실 인사위원회 선임행정관과 인사지원팀장, 대통령비서실 인사비서관, 인사혁신처 처장으로 인사 분야 전문가의 길을 걸었다.

한 업무만 계속하면 승진의 한계가 있다 하여 대부분 사람들이 기피한다. 자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없고 관장 업무가 넓어지는 승진 시를 생각하며 다른 업무도 맡기를 대부분이 바란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인사 업무를 벗어나려 하기 보다 더 나은 인사 정책을 입안하고 그 정책의 성공적 정착에 소명처럼 자신을 던졌다. 우리나라 공무원 인사제도의 굵직한 줄기들이 그를 통해 만들어졌으니 그에게 개인적으로는 영광의 기록이고 국가 인사제도의 큰 줄기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최초 공무원 육아휴직 제도 제안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인사국 인사기획과 사무관으로 근무 시 공무원 인사정책 중 커다란 획을 그은 제도가 그의 제안으로 도입됐으니 바로 공무원 육아휴직제도이다. 당시까지 남성 중심의 인사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녀 성별을 떠나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공직이었지만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아기를 가지게 되면 그만 두어야 하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90년대 초반 육아휴직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외국의 사례를 조사했다. 연구논문류 외에 외국의 관보까지 꼼꼼하게 검토해 우리나라에 맞는 인사정책을 만들었다. 공무원 인사제도는 보고로 시행되지 않는다. 법제화가 되어야 한다.

법을 개정하려면 다른 법과의 관련성도 검토하여야 한다. 그의 제안에 따라「국가공무원법」개정작업이 시작됐다. 6개월 만에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일본이 공무원육아휴직제도를 법제화하는데 수년이 걸렸음을 감안할 때 6개월만의 공무원법 개정안 통과는 대단한 일이었다.

공무원 성과급제 도입

공무원노조가 큰 반발을 했던 공무원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일반 회사에서도 성과급제는 총론으로 찬성하더라도 실제 제도로 도입을 할 땐 큰 반발로 좌초하기 십상이었다. 급여정책과 과장 재임 시 공무원성과급제라는 공직 사회의 큰 획을 긋는 제도를 도입했다. 제도를 입안해 밀어붙이기 식으로 추진했더라면 그 시행착오로 자칫 실패하거나 누더기 제도가 되어 이름만의 ‘성과급제’가 될 수 있는 시도였다.

김동극 당시 급여정책과장은 전국의 공무원 직장협의회 대표와 관계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당시 공무원 직장협의회는 성과급 반대 투장을 불사하고 있었다. 공무원직장협의회는 성과급제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심각한 오해를 하기도 했다.

그들의 오해로 인한 불만도 바로 반박을 하지 않고 들었다. 그들의 걱정에 대해 공감하면서 신뢰를 얻고 성과급제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었고 공직 사회에도 필요한 제도라는 공감대를 넓혀갈 수 있었다. 학자들은 당시를 평가하며 ‘공무원 성과급제는 김동극 급여정책과장의 끈질긴 노력과 설득의 결실’이라 하기도 한다.

차별과 갈등 없애는 직종체계 단순화

공무원들 사이에 있던 각종 차별과 갈등을 없애는 직종체계를 단순화했다. 1981년 확립된 공무원직종체계가 업무환경이 변화하며 행정의 비효율을 초래하고 직종간의 갈등을 유발했다. 일반직, 특정직, 기능직, 정무직, 별정직, 계약직 등 6개로 구분되던 직종을 4개로 단순화했다.

경력직에서 일반직, 특정직, 기능직 3가지 직종을 일반직과 특정직 2가지 직종으로 개편하고 특수경력직에서 정무직, 별정직, 계약직 3가지 직종을 정무직과 별정직 2가지로 개편했다. 기능직과 계약직을 일반직으로 통합한 것이다. 별도의 관리가 필요한 비서관, 비서, 정책보좌관은 별정직으로 분류했다. 기능직, 별정직, 계약직의 일반직화는 당시 일반직 공무원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어려운 시험과 임용 절차를 거쳐 공무원이 된 일반직들에게 기능 중심의 업무자들을 일반직으로 받아들이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밀어붙이기 식으로만 시행되면 그 시행에 있어 많은 시행착오가 우려되기도 했다.

김동극 당시 인사정책관은 반대의 의견을 편견 없이 들었다. 공무원 노조(당시 공무원 노조가 활성화돼 있었다)를 비롯해 누구든지 의견을 말하면 들었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진 오해의 이야기도 들었고 환경 변화에 따른 공직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당시 ‘김동극 인사정책관의 추진력이 제도 도입의 결실을 맺었다.’고 하지만 그 뒤에는 그의 소통 노력이 있었다.

소통을 기반으로 한 추진력이라고 볼 수 있다. 소통을 통해 제도 개혁을 이룰 수 있던 기반에는 다른 나라의 직종에 대한 연구를 세밀하게 하였던 그의 준비성이 큰 몫을 한다. 공무원 직종 개편은 우리나라 헌정사에서「국가공무원법」개정안을 최단시간에 국회에서 통과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국회 상임위원회 통과, 법사위 통과, 본회의 통과에 2~3일밖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공무원연금제도 개혁

재직자가 퇴직자의 연금을 보전하는 구조로 운영되던 공무원연금제도를 개혁했다. 백세시대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시대가 되면서 재직자가 퇴직자의 연금을 보전하는 구조로 되어 있는 공무원연금은 고갈 위기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공무원연금 적자를 국고로 보전하면서 국가 재정부담의 우려가 제기된다.

당시 김동극 행정안전부 성과후생국장은 연금개혁론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당시의 연금제도 유지를 바라는 공무원 노조 사이에서 자칫 좌초할 수 있었던 공무원연금제도의 개혁을 이루어 내었다. 개혁안을 마련하는 학자들만이 아니라 전교조, 교총, 전공노, 공노총, 민공노 등 5개 노조대표들도 제도 개혁 논의에 참여시켰다. 이들 노조들도 공무원연금제도발전위원회에 포함되어 공무원연금개혁에 대한 열띤 논의를 펼칠 수 있었다.

술을 좋아하지도 않고 내성적이기도 한 그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현장의 목소리를 담고 실행력 있는 제도 개혁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누구든 만났다. 현장의 목소리만이 아니라 전문성을 기르기 위한 그의 노력도 큰 몫을 했다. 연금개혁론 학자들의 복잡하고 난해한 산식과 그래프를 꼼꼼하게 검토하여 오류을 찾아내어 학자들이 감탄하기도 하였다.

당시 민간 전문가 출신 청와대 수석들이 ‘노조와의 야합’ 의혹을 제기하며 연금개혁안에 반대하였지만 밀어붙인 추진력은 당시 김동극 국장의 현장과의 소통과 전문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재해공무원 보상체계 마련

국가에 헌신·봉사한 재해 공무원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고 확실하게 보상하는 체계로 공무원재해보상제도를 만들었다. 인사혁신처장으로 취임한 김동극처장은 공무원 재해보상법을 제정했다. 그때까지 공무상 재해는 연금법 안에서 해결하면 되는 줄로 알았다. 이런 제도를 민간기업에서 국민연금과 산재보상이 별도인 것처럼 만들었다. 당시까지 공무상 사망 혹은 부상은 드물었는지라 공무원들의 관심도 별로 크지 않았다.

공무상 재해가 여론화도 되지 않았지만 그는 재해를 당한 당사자나 가족의 입장에서는 심각함을 보고 재해보상제도를 추진했다. 공무상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사람들이 대부분 젊은 사람이다. 재해는 유족의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하는데 노후 연금을 기준으로 한 연금법 속 재해 보상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민간의 산업재해 보상과 같은 면에서 접근하는 체계로 바꾸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무원 재해보상은 그가 과장 재직 시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제도이다. 김동극 처장은 별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재해를 당한 유족의 입장에서 접근했다. 이 제도가 입안되어서야 사람들이 이런 제도가 아직까지 없었느냐고 할 정도로 중요한 법안이었다. 「공무원재해보상법」은 박근혜정부 시절 입안했지만 탄핵의 시기에 표류하다가 문재인정부 들어 2018년에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황재천(프리랜서) 기자 / 오공환 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김동극 전 인사혁신처장 프로필

-오운초등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행정고시 29회
-총무처 인사국 인사기획과 사무관
-중앙인사위원회 기획총괄과 서기관
-중앙인사위원회 인사정책과 과장
-급여정책과 과장
-중앙인사위원회 인사정책국 정책총괄과 과장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 인사수석비서관실 인사관리행정관
-중앙인사위원회 성과후생국장
-행정안전부 성과후생국장
-행정안전부 인사실 인력개발관과 인사정책관
-박근혜정부 대통령비서실 인사위원회
-선임행정관과 인사지원팀장
-대통령비서실 인사비서관, 인사혁신처 처장
-(현)법무법인 대륙아주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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