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 (시조시인, 본지 논설위원)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일선 학교에서는 ‘가훈 전시회’라는 게 있었습니다. 가정교육의 중요성에서 비롯되었지만, 인간성회복에 대한 시책이었던 셈입니다.
‘가화만사성’이 가장 대표적인 가훈이었는데 ‘제 팔 제가 흔들기’같은 눈에 띄는 특별한 가훈 앞에는 많은 이들이 몰려서 수군대기도 했습니다. 그 뒤로 사회변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져서 큼지막한 공공기관의 입구에만 구호로 걸려 있을 뿐, 사회적 합의를 위한 그 어떤 구호나 경구, 가훈이 뵈지 않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경구가 있습니다. 한때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Carpe Diem(카르페 디엠)!”이란 경구를 유행처럼 좋아했습니다. 예전보다 좀 더 현명해진 지금은 ‘소학행’이라든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웰빙(well-being)과 ‘웰다잉(well-diying)의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 같이 제 잘난 멋에 살고 있는 세상살이에서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을 상기하면 헛된 욕심과 오만을 경계할 수는 있겠지요.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라틴어인데, 로마제국이 번성할 때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전쟁 영웅들의 개선행진 전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웅들이 개선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함성 속에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고 교만해지거나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 소리꾼으로 하여금 개선장군의 바로 뒤에서 “메멘토 모리”를 외치도록 한 것이지요.
개선장군에게 메멘토 모리의 외침을 듣게 한 것은 “당신도 언젠가 살육 당한 적들과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르니 항상 경계하라”는 뜻도 있었을 것이고, “전공으로 우쭐해 반란을 꾀하다 사형을 당하지 말고 겸손하라”는 뜻도 있었을 겁니다. 우리네 역사 속에서도 개국공신이었던 이들이 부관참시당한 이도 있었고, 명예롭지 못한 죽음 또한 얼마나 많았나를 돌아보면 동서양이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죽음은 밤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 이상으로 피할 수 없는 철칙입니다. 죽음에 대한 대비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착하고 겸손하게’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성공을 지속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고난 속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언제나 꼭대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어도, 그들은 오르는 데도 익숙했지만, 내려가야 할 시기가 오면 두말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억울하다고 법정 다툼을 하지 않았고, 거짓 자서전으로 대중을 현혹시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 나타나 화려한 과거를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어제를 버려야 오늘을 맞이할 수 있고, 오늘을 버려야 내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현명한 자는 인생이 산을 타는 것처럼 계속 오를 수만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리미리 내려가는 길에 대한 준비를 해 놓는 것입니다. 오르면서 내려갈 때를 미리 생각하고, 정상에 올라서도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살아서 누린 것보다 죽어서 그 이름값을 올린 이들을 역사가 기록해두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평생을 살다 보면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도 있지만, 모든 것이 승승장구 순조롭고 잘 나갈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공이나 승리에 도취되면 안 되고, 피할 수 없는 죽음처럼 그것 역시 끝날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겸손’입니다. 앞에 가던 사람이나 뒤에 가는 사람이나 모두 종점에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앞에 간다고 우쭐대고 뒤를 무시해서는 안 되고, 뒤에 간다고 앞을 시기하거나 기죽을 것 없습니다.
요즘 TV 뉴스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스러진 초신성은 또 얼마나 흔합니까. 골리앗 같던 거물급 인사들도 언젠가는 다윗의 돌팔매에 쓰러집니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케케묵은 과거 행적 하나가 발목을 잡아 넘어뜨리는 경우는 왜 그리 흔합니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입니다. 십 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가는 붉은 꽃 없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경구는 없습니다. 수년 전 문학기행에서 들렀던 양평 잔아문학관 2층 계단 벽에 붙어 있는 세계 유명 문호들의 묘비명을 보면서 짧지만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메멘토 모리!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영원한 승리, 영속적인 권력은 없습니다. 문학하는 사람도 항상 죽음과 같은 마지막을 염두에 두면서 미리 준비하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