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향을 위한 꿈을 꾸고 실천하는 생활을 준비해야죠”

해외 선교 여행
해외 선교 여행

여느 지방 중소 도시처럼 영주도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지방소멸위험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 당국이 각종 인구정책을 내놓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인구증가 정책이 출산장려와 귀농 귀촌 운동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귀향운동으로의 페러다임 변화가 절실하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 머물고 있는 지역 출향인은 대략 3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본지는 이들 출향인이 은퇴 후 자신이 평생 직장생활을 하며 쌓아온 경륜을 귀향을 통해 고향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는 애향인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번 애향인 인터뷰를 통해 인구증가를 위한 귀향정책과 지역발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편집자 주> 

고향에서의 성장기 20년, 직장 생활 20년, 해외 생활 20년, 늦은 향학열 10년

고교출신 은행원 한계 극복한 ‘글로벌 맨’
증권가 생활과 우연히 찾아온 사업체 경영
현재 창조론 중심으로 신학의 새 지평 열어

허정윤 박사는 사회생활 초기에는 외환은행, 종합금융, 증권회사, 보험회사 등의 금융업계와 제조업 상장회사 등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사회생활 후기에는 전자부품 업체를 설립해 필리핀과 중국에서 직접 사업체를 경영했다.

사회생활 퇴직 후 총신대 사회교육원에서 신학사(Th.B.)를,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Th.M.)를, 평택대 피어선 신학전문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 D.)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 ‘과학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발생에서부터 한민족 교회에 유입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중심으로’를 썼고, 저서로는 『과학과 신의 전쟁』, 『기독교, 과학적 무신론, 그리고 항일 독립운동』을 출판했으며, 팩션『흑암전설』을 출판했다. 그동안 창조론에 관련한 다수의 논문과 칼럼들을 [창조론 오픈포럼]과 [크리스천 투데이], [기독일보] 등에 발표했다.

현재 케리그마 신학연구원(KTA) 연구교수,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알파와 오메가 창조론연구소’(Daum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으며, [기독교 신문]에 ‘창조론적 종말론’에 대한 칼럼을 쓰고 있다

논문발표
논문발표

영주 제일고 졸업반에 한 장만 배정된 한국외환은행 입행원서

허 박사는 사회생활의 첫발을 한국외환은행에서 시작했다. 영주중학교와 제일고등학교(당시 영주종고) 재학 시절의 은사인 김영하 교감의 추천 덕분이었다. 상업과 학생이면서도 대학 진학을 꿈꾸고 준비하던 그에게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김영하 선생의 부름을 받았다.

김영하 교감으로부터 “이 원서는 너밖에 쓸 사람이 없다. 상과에서 네가 영어를 제일 잘하니까 잘 할 수 있을 거야”란 말과 함께 외환은행 입행시험 원서 1장을 받았다. 당시 입행원서는 매우 한정적으로 발부됐다.

물론 영주제일고(당시 영주종고)에도 한 장의 입행원서만 발부됐다. 어려운 살림을 꾸리던 부모님의 취업 기대에 떠밀리다시피 응시하게 된 한국외환은행 입행 시험, 그는 시험과목과 배점을 조사하고 촌음을 아껴가며 준비해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그의 한국외환은행 입행 시험 합격은 학교 선생님들의 환호와 칭찬으로 이어졌고 친구들이 다 함께 기뻐해준 큰 사건이었으며 영주에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화젯거리였다.

당시, 한국외환은행은 합격자를 곧바로 소집, 신체검사를 하고 실무연수를 했는지라 그는 바로 서울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직장들은 모두 토요일에도 근무해야 하던 때인지라 서울과 영주를 오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재학 중의 취업인지라 자랑스러운 졸업생으로 공로상이 그에게 수여됐으나 졸업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졸업장과 함께 공로상장을 받고 새삼 모교의 교직원과 친구들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옥대리에서 포크레인 작업중
옥대리에서 포크레인 작업중

금융권 직장 생활 그리고 고객 피해에 대한 고민과 변신

고향 영주와는 전혀 다른 서울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입행 몇 달 뒤의 갑작스런 인사과 발령으로 더욱 바쁜 직장 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외환은행은 엘리트 출신들이 입행하는 곳이었다.

KS(경기고-서울대) 인맥이 주도하고 있었다. 인사과는 그 조직의 인적 구조와 그 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은행은 대학을 나와야 승진에도 유리한 조직 구조였다. 채용 당시의 신분에 따라 책임이 맡겨지는 상황을 보고 그는 낮에는 은행 일을, 밤에는 국제대학 영문학과 대학생으로 주경야독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국제대학은 공부를 잘 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야 했던 인재들이 야간에 공부하는 곳이었다. 주경야독의 생활이 힘들었지만 그는 대학에서 두 번이나 영어연극을 기획해 공연에 성공했고, 아내가 된 클라스 메이트와 데이트도 했다.

그는 국제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고려대 경영대학원에 증권분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증권분석사 과정은 고려대 경영대학원에 처음 개설된 자격증 과정으로 여기서 취득한 자격증은 그를 한‧영 합작회사로 설립된 한국종합금융회사로 옮겨 가게 된 계기가 됐다.

당시 한국외환은행은 서정쇄신 정책으로 급여가 대폭 삭감된 점도 있었고 고졸 입사란 점이 끝까지 꼬리처럼 따라붙은 경직된 조직구조의 탓도 있었다. 당시 증권시장은 막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동료들의 권유로 투자한 주식은 서울에 주택을 마련할 수 있게 하는 등 그에게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줬다.

그 뒤 그는 증권회사로 이직했다. 요직으로 평가받는 명동지점이었다. 증권회사 임직원의 증권거래는 불법인지라 원칙을 따지는 그는 그 후 주식투자를 하지 않았다. 증권은 시황에 따라 주식이 등락을 한다.

그의 증권회사 재임 중 주식 폭락 장세가 왔다. 그 때 많은 고객들이 피해를 봤다. 고객들이 주식 폭락의 피해를 입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가슴 아파하며 증권회사 생활에 회의를 가지며 사직했다고 회상했다.

뜻밖의 제조업 경영 기회, 그리고 글로벌맨으로서의 생활

사업자금을 빌려갔던 지인이 지병으로 경영을 못하게 되면서 그에게 회사 인수를 떠맡기는 일이 벌어졌다. 회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소규모 제조업이었다. 한 명의 관리자와 열 명도 안 되는 여성 생산직원들이 작은 기계를 돌리는 곳이었다.

전화기와 헤드폰 등에 들어가는 소형 스피커와 마이크 제조용 부품(voice coil)을 생산하는 회사였으며 계속 적자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회사 인수를 제안한 지인의 지병 상황이 곧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상태여서 회사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인수를 결정했다. 지인에게는 걱정 말고 건강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고 위로했다.

적자가 지속되는 회사라 경영 유지에 고민이 많았으나 사장 보다 일찍 출근해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보고 힘을 얻고 처음 경험인 제조업 경영을 시작했다. 당시 무선전화기와 소형 워크맨의 보급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트렌드에 주목했다.

‘맥슨전자’의 무선전화기와 소형 FM 라디오 겸 재생용 ‘워크맨’이 보급되기 시작하고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거기에 새로 건축하는 아파트나 집은 여러 대의 전화기를 설치하도록 설계됐다.

젊은이들은 ‘워크맨’과 그것에 꽂는 헤드폰이 필수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는 제조업의 치명적인 문제인 품질을 잘 관리하는 일에 가장 신경을 썼다. 덕분에 품질에서 거래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핸드폰의 등장은 그의 회사가 생산하는 코일의 수요를 대폭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설비 투자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경쟁업체들이 등장했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투자했다. 거래처의 수요보다 앞서 나가는 투자를 하지 않았다. 필리핀과 중국에 진출하는 거래처를 따라서 동반 진출했다. 그렇게 필리핀에서 20년 가량 사업을 하고, 중국에서 5년의 기간 동안 필리핀을 오가며 사업을 하는 글로벌맨이 됐다.

사업에 몰두하면서 얻은 질환, 새로운 길로 이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외에서 사업을 하다가 어느덧 맞게 된 환갑의 나이, 그에게 질환이 찾아왔다. 무릎에 발생한 통풍은 정상적 생활을 하기 힘들게 했다. 통풍의 주된 원인으로 육식과 과음이 지적된다.

거래처와의 회식이나 해외 현지 출장에서 술을 마시지 않기는 어렵다. 사업을 하면서 통풍의 발병과 치료가 반복됐다. 마지막에는 퉁퉁 부은 무릎에서 한 사발 가량의 물을 빼니 위아래 다리가 따로 놀고 땅을 딛고 서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자꾸 이러면 죽습니다”라는 의사의 경고가 사업을 정리하는 계기가 됐다.

현지에서 사업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알토란같은 사업을 넘겼다. 중국 공장은 그곳 공장장에게 넘겨주고, 필리핀 공장은 거래처 퇴직 직원에게 양도했다. 현지에 이익을 환원하는 차원이기도 했다.

사업을 정리한 그는 미뤄뒀던 기독교 신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 뒤 창조론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기독교 신학의 학문 활동을 했고 학문의 길로 접어들며 육식과 음주를 피하니 건강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건강이 좋아지니 학문 활동도 더욱 왕성하게 할 수 있고 지난 해 부터는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단산면 옥대4리(모산동)에 그동안 묵혀왔던 산과 밭을 가꾸기 시작했다. 허 박사는 환갑을 넘어 시작한 은퇴 후의 삶이라 말하지만 기자가 보기에 ‘조용하게 지내는 은퇴’가 아니라 새롭게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년 해외 생활 경험 고향에서 활용 계획

20년이란 시간을 해외에서 보낸 허 박사가 고향에 와서 보게 된 외국인 근로자, 농촌 총각들의 국제결혼 증가는 새삼 눈에 들어오는 사안이다. 그는 자신의 해외 경험을 활용할 기회가 무엇인지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

오랜 기간의 해외 생활 경험이 영주 산품의 글로벌 판매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고민하고 있다. 고향 영주가 더욱 더 발전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인구의 감소를 막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향에 돌아와서 고향을 떠날 때와는 달라진 모습을 보며, 귀향인 또는 귀촌인이 타지에서 보고 배운 것을 활용하려고 할 때, 주변에서 적극 협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기도 하다.

‘귀향인 박사클럽’ 조직 제안

허 박사는 귀향 귀촌한 박사들이 영주 발전을 위해 자신들의 전문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영주에 사니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귀향인 박사클럽’을 제안한다.

영주를 위해 자신의 전문성을 어떻게 쓸지를 고민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지역 사람들의 요청에 부응하는 그런 모임이 조만간 만들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허정윤 박사 프로필

단산면 옥대리 출생
옥대초등학교 졸
영주중학교 졸
영주제일고(당시 종합고등학교 상업과 1회) 졸
국제대학 영문학과 졸(낮에는 은행에서 근무하고 야간에 학교 공부)
숭실대 신학사, 신학석사
평택대 신학박사
(현) 케리그마 신학연구원(KTA) 연구교수,
(현) 창조론오픈포럼 공동대표,
(현) ‘알파와 오메가 창조론연구소’ 운영

저서 : 『과학적 무신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박사학위 논문), 『과학과 신의 전쟁』, 『기독교, 과학적 무신론, 그리고 항일 독립운동』『흑암전설』

황재천(프리랜서) 기자 / 오공환 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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