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식 교수의 그림이야기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출간
지난 25일 발간된 이 교수의 수필집은 그의 인생과 미술에 관한 철학을 담고 있는 이야기 형식의 짧은 글 모음집이다. 그는 ‘이두식 교수의 그림 이야기<고릴라 로마역에 서다>’(도서출판 정음)를 통하여 어린 시절과 아버지에 대한 회상에서부터 고향 영주에 관한 이야기, 서울예술고 재학 시절의 추억과 나중에 아내가 된 동창생 손혜경과의 사랑이야기, 고학 비슷하게 다닌 대학 재학 시절과 ROTC 장교 생활, 제대 후 모교 조교 시절과 생활의 어려움으로 이발소 그림을 그리던 일, 화가로서의 일상, 그림에 대한 철학과 인생관, 이태리 로마의 지하철역에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그림이 전시된 일 등을 두루 말하고 있다. 이두식은 이 책을 통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그림 감상조차도 다른 세상 이야기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잊고 지냈던 그림에 대한 향수를 불러와서 그림과 가까이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누구나 화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화가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전업 작가만이 화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림은 특별한 사람들만이 그리고, 전시회에서 감상하고, 소장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쉽게 자신의 감정을 담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화가의 그림에 이론적인 주석을 달아 오히려 그림의 이해를 어렵게 만든 평론의 문제와 숨죽이며 걸음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하는 편안하지 않는 관람문화 등이 보통사람들을 다른 영상매체로 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림은 다른 영상물로는 대체할 수 없는 맛이 있다. 그리는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고, 깊이가 있으며, 획일적이지 않는 다양한 감상미가 있다. 또한 이 책을 쓴 화가 이두식의 예술 철학과 인생 이야기는 많은 화가 지망생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린 40년 넘게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고, 그림 앞에서는 감상자와의 소통을 위해 명상한 다음 그림을 그린다”는 그의 엄숙한 자세는 배울 만하다. 저자는 또한 미래의 전업 작가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는 로마 2000년 기념사업 중 하나였던 지하 미술관 작업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초대되었던 작가이며, 뉴욕 브뤼스터 화랑 초대작가이다. 그는 한국의 잔칫날과 오방색, 동양의 붓 모필을 사용한 한국정서가 가득 담긴 그림으로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그림은 세계 공통어이기 때문에 더 쉽게 세계인들과 만날 수 있다.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무엇을 주제로 그리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세계인들로부터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지를 그림에 얽힌 일화들을 통해 재미있게 말하고 있다.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이두식은 일반 사람들의 감성을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작가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무서운 열정과 화가들 누구나 겪는 어려운 현실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부딪혀 온 그의 정신은 건강한 예술가의 모습으로 일반인들에게도 화가에 대한 친근감을 준다.
스물여섯 살 때 아버지의 바람이었던 대한민국미술대전의 특선을 받았고, 그림 그리는 고릴라로 세상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이후 신상전 최고상, 문공부 신인예술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새벽이면 어김없이 캔버스 앞에 선다. “작은 소망이 있다면 내 그림이 거창한 빌딩 아닌 누추한 시골 농가에 걸리더라도 사람의 가슴에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한 “위대한 화가가 되기보다는 사랑스러운 화가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미술이 특정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1996년 최연소 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을 때는 ‘한 집 한 그림 걸기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에 대한 열정은 자연스럽게 선미술상, 마니프대상, 대한민국보관문화훈장, 문신미술상 등을 수상하는 영예로도 이어지며 한국서양화단을 대표하는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서울, 부산, 파리, 뉴욕, 도쿄 등지에서 모두 46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제1회 서울 비엔날레(1974),에콜드 서울(1976-97),끼뉴 국제회화제(1984),상파울로 제비엔날레(1987), 동경 아시아평화미술전(2000) 등 국내외 주요 기획전에 참가했다. 한편 2000년에는 세계로 통하는 이탈리아 로마 플라미니오(Flaminio)역에 그의 그림이 벽화가 되어 걸렸다. 먼 길을 걸어 드디어 로마 역에 선 것이다. 그는 “그림이 완성되면 그것은 나의 손을 떠나 감상자에게, 소장자에게 환하고 즐거운 얼굴로 다가가 그들에게 잔칫날의 흥겨움을 던져 주고 싶다”고 말한다. 서울에서부터 북경, 뉴욕, 불가리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 미술관에 그의 그림이 주인이 되어 환하게 걸려 있다. “세계가 나의 그림으로 환해지면 나도 세상이 울리도록 크게 웃고 싶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 미술을 접하면 장차 아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향기 없는 꽃에는 벌이 모이지 않는다. 꽃뿐 아니라, 특색이 없는 사람은 그만큼 매력이 없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화가적인 기질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일반인도 그림그리기를 통하여 세상을 한층 매력적으로 살 수 있다. 독일의 바리톤 가수인 피셔 디스카우는 성악가지만 화가로도 활동하며 개인전을 많이 열었다. 안소니 퀸 또한 영화배우지만 화가로도 유명하다. 처칠도 정치인이면서 화가였다. 박정희 대통령도 여가 때는 그림을 그렸다. 예뻐하는 강아지도 그리고 파나마모자도 그렸다.
직업이 아니라도 모두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닮지 않아도 좋다. 누가 뭐라던 나의 감성을 표현할 수 있으면 된다. 하늘을 우러르며 햇살이 정말 눈부심을 마음껏 음미하고, 나만의 감동을 옮기면 된다. 심취하면 할수록 그림은 훌륭해진다. 여가 시간에 TV를 끄고 조그만 종이에다 끼적끼적 상상하는 그림을 그려도 좋다. 실물을 보고 그릴 수도 있다. 여행길에 산이 있고 강이 있는 풍경이 멋지다고 느껴졌다면 수첩이나 종이를 꺼내 들고 그리면 된다. 이 교수는 늘 소묘를 강조하는 사람이다. 그 역시 소묘연습에 대한 끈질긴 장인 정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빨리 그려지면서도 표표한 작품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더 큰 이유도 있었다. 짝사랑하는 여학생 가까이 살고 싶어 하숙방을 옮겨 가며 끊임없는 순정의 방식으로 사랑과 그림에 매달린다. 작가가 오로지 그림 하나에 매달린 것처럼 16살에 만나 26살에 결혼하고 56살에 아내를 떠나보내기까지 아내에 대한 사랑의 기억은 그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절절하다.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지나 집안이 몰락해 고학생으로 대학을 졸업하며 정신적인 방황을 스스로 극복하려 ROTC에 지원하기까지 그의 순수하지만 끊임없는 자기 발전에 대한 노력은 차후에 그의 영역을 넓히는데 공헌을 한다. 아울러 광화문 시절 예술혼을 교류한 음악인들과 책의 삽화를 그려 주며 만났던 작가와 영화 작업을 할 때 만났던 영화인들의 이야기. 이들에 대한 경험과 사랑은 화가로서의 그의 기본적인 프로의식뿐만 아니라 조직폭력배의 주례까지 서 줄 정도로 선민의식 없는 그의 평등한 정신에서 나오는 인생의 이야기 거리들이다. 또 재미있는 것 중에 하나는 실질적으로 미술 감상과 그리기에 관한 내용이다. 미술 감상을 어렵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서 그림을 감상하는 법과, 감상에 도움이 되는 여러 항목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샤갈전을 보러 갔을 때 “‘사람이 어떻게 날아가?, “동물이 어떻게 음악을 연주해? ‘샤갈은 날아가고 싶었나 보지’, ‘샤갈은 동물도 음악을 연주하길 바랐나 보지’ 하면서 생각을 연결시켜 보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미술의 감상법”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림에 대한 사랑은 어떤 특별한 계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그림을 사랑해주는 관람객을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화가의 입장을 대표한다. 그림의 기본은 소묘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철학과 추상화에 대한 이야기도 계속하고 있다. 성년이 훨씬 지나 스승이 되고 장인 즉 대가로서의 반열에 들어선 지금, 그는 마치 동네 할아버지가 그림을 가르쳐 주듯 예술의 전당 ‘이두식 화백의 영재 미술 아카데미’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친다.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노하우는 칭찬 한마디,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는 자유. 이것은 그가 단적으로 유년 시절 부모님으로 받았던 사랑과 관심 그리고 학창시절 스승들로부터 받았던 관심을 사회에 환기시키는 방식이다. 화가 이두식은 늘 “감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감성은 단순한 감성의 차원이 아니라 인격의 소양을 의미한다. 그리고 화가로서의 감상자에 대한 자세와 전업 화가로 대성하는 길은 무엇인지 후학들에게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급변하는 세계 미술의 흐름에서도 자신만의 고집과 좌표를 잃지 않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고독하지만 아름다운 예술가로 남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두식 교수의 그림이야기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는 미술을 공부하는 미술학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감춰졌던 그림에 대한 향수와 성공한 환쟁이의 인생, 철학, 사상을 느끼게 하는 저작이다. |
김수종 기자
daipapa@par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