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과 지연'을 다시 생각하게 한 관세사 장화식씨
고향에서 발간되는 영주시민신문에 글을 다시 쓴 지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글을 보고 간혹 소식을 전해오는 선후배들이 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바쁜 관계로 모든 사람을 만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은 쉽지 않다. 틈틈이 인터뷰 했던 몇몇 분들과는 다시 만나기도 하고 술을 한잔씩 하면서 고향소식도 전하고 사람들 간에 오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때때로 연락이 오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전혀 일식 면이 없는 분들도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지인들도 있다. 가끔은 친척 분들이 전화를 걸어와 놀라는 경우도 있고, 오랫동안 소식을 몰랐던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당혹스러운 경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선배 분들의 연락이다. 후배라면 "바쁘다"는 핑계로 그럭저럭 넘어가는 수도 있지만, 선배 분들의 경우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무실이 있는 종로까지 와서 전화를 걸어 올 때면 더욱 난감하다.
관세사 장화식씨와의 갑작스런 만남
두어 주 전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김수종씨” 낫 익은 경상도 말투였다. “예, 누구십니까? “나 영광고 16회 장화식(53) 관세사야” 평소 동문회에서 안면이 있던 선배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요즘 자주 자네 글을 보고 있는데 오늘 갑자기 생각이 나서” 반가운 전화였다. “예, 감사합니다. 이렇게 전화를 다 주시고, 시간되면 다음에 동문회에서나 다른 모임이 있을 때 한번 뵙죠”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조만간 종로에 갈 일이 있으니 그 때 식사나 한번 하자고” “ 예, 감사합니다” 일상적인 선후배 혹은 독자와의 대화로 끝이 났다. “조만간 한번 찾아가겠다”는 말은 다시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진 그냥 인사치레로 흘려들었다.
그러나 정말 며칠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나 장화식인데, 지금 일산 집에서 출발하면 정오 전에 도착할테니 종로에서 보자구” “예, 정오경에 뵙죠” 오전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점심식사를 할 겸 종로3가의 단성사 앞으로 갔다. 이미 장화식 선배는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작년 연말 동문회 때 뵙고 7개월 만이군요” “그래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 좀 하세” 이렇게 우연히(?) 관세사 장화식씨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점심을 서둘러 하고는 복잡한 식당에서 나와 근처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넬 보자고 한 건 덕분에 고향사람들 소식을 자주 읽게 되어 고맙다는 말과 나도 영주와 동문들을 위해 조그만 힘도 되고 또 도움도 받았으면 해서네” “제 글을 잘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영주와 동문들을 위해 힘이 되고자 하신다니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이렇게 본격적인 대화는 시작되었다.
사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만난 동문선배에게서 장화식씨에 대해 조금 들은 것이 있어 전혀 부담 없이 만났지만 “도움을 받고 싶다”는 말에는 약간 멈칫했다.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라는 것은 글로서 사람을 소개하는 정도인데, 그런 것이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돈도 없고 관세사와는 전혀 무관한 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 무엇을 도와야 할지 조금은 답답했다. 하지만 ‘어차피 사정을 알고 만난 것이라면 크게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장화식씨가 도와달라고 한 것은 취재해 달라는 상투적인 부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동문선후배들을 자주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과 자신도 “그들과 함께 친해지고 싶고 또 자주 만나면서 도움도 주고받을 수 있었으면 한다”는 원만한 학연, 지연관계 형성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상주 함창 출신으로 어린 시절 영주로 이사를 와서 초, 중, 고교를 영주에서 다녔고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20년 넘게 경인지역에서 세관근무를 했고, 98년 퇴직을 했다. 이후 중국으로 가서 3년간 사업을 하다가 귀국하여 천안에서 월급쟁이로 관세사 일을 시작하여 2년 전 독립했다. 낯선 땅에서 관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관계로 특별히 내세울 “학연도 지연도 없어 약간은 고전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학연과 지연'의 소중함 느껴
상주에서 태어나 학교는 영주에서 다녀 반쯤은 영주 사람이고,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을 하면서 늘 경인지역에서 살았고, 이후 중국에서 3년, 다시 귀국하여 낯설고 물설은 충청도 천안에 자리를 잡아 월급쟁이에서 독립하여 사업을 시작해 어느 정도는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심적으로는 부담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제라도 “동문들과 고향 선후배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자신도 적극 동참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나이가 들면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만 가는가 보다. 별 볼일 없는 후배에게까지 찾아 올 정도이니 말이다.
하지만 관세사라고 하는 직업은 흔한 자영업자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입도 많고, 생활도 안정된 전문직종이다. 그래서 사실은 ‘부탁을 하려는 목적보다는 선후배와 만나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장화식씨는 현재 일산에서 천안을 오가며 관세사 일을 하고 있다. 관세사 업무라는 것이 일상적인 일은 지역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고 인터넷 시대인 관계로 수출은 전국 어디든 무관하게 일을 받을 수 있고, 수입의 경우에도 통관하는 지역으로 들어오는 물품이면 좋기는 하지만, 거의 지역과도 무관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전국을 돌면서 영업을 주로 하고 내부 업무는 상근직원들이 전부 처리한다고 한다. 아무튼 관세사의 업무에 대해 듣고서 기회가 되면 동문이나 향우들 가운데 수출입이 많은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분들과 한번 연결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식사를 하고 차를 한잔 하면서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는 이야기며, 동문회, 영주의 소식을 많이 전해주었다. 다가오는 선거 이야기며 출마 동향에 관한 분석도 있었다. 반대로 들은 이야기는 고교 동창 중에 특히 친한 10여명의 친구모임이 1년에 1번씩 여름에 열린다는 것과 사업과 함께 일상에 대해서도 들었다. 여행사를 하다가 요즘은 어려워진 친구며, 빛 보증을 잘못서서 파산하여 어렵게 학원 강사 일을 하고 있는 친구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영주를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고파
또한 뇌성마비로 중국에서 10년 넘게 치료 중인 장남과 그 아들과 관련된 일로 오랜 공무원 생활을 그만 둔 사건에 대해서도 들었다. 차라리 정년퇴직을 하고 나와서 남들이 쉴 나이에 관세사 개업을 하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퇴직을 하고서 자기 사업을 하게 된 것이 장애를 가진 큰 아들을 위해서도 좋고, 자신을 위해서도 잘된 것 같다”는 말도 들었다. 아울러 둘째 아들과 중학교에 다니는 딸에 대한 자랑도 들을 수 있었다.
그와 짧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과 "장애인 아들을 두었다"는 말에 글을 쓰게 되었다. 별로 재미없다고 말할지도 모를 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말이다.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선후배들을 빨리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오늘은 새삼스럽게 ‘학연과 지연’이라는 말을 몇 번씩 되풀이하여 떠올리게 되는 날이다.
(관세사 장화식씨 연락처 011-741-556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