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 (소설가·본지논설위원)

25여 년이 지난 지금도 확인해 보고 싶은 일이다. 호반의 도시 루체른을 여행할 때 버스 안에서였다. 유학 온 여행 안내자가 ‘스위스는 국가와 정부의 수장이 연방의회의 의장인데, 총리격인 의장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했다.

총리라고 하면 한 나라의 정상이거나 이인자이다. 왕이 있어도 총리가 최고통치자인 나라도 있다. 장차관의 이름을 모르는 수는 있겠지만 최고 권력자인 총리의 이름을 모를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대통령에 해당하는 연방의회의 의장, 총리 이름을 모르는 국민들이 있다는 말인데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나라 성인으로서 총리 이름을 모르면 상식 없는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실수로 한 말은 아닌 듯하다. 총리 이름을 모르는 국민들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여 고국에서 온 우리들에게 얘깃거리로 삼았을 것이다. 총리 이름을 모르는데 다른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은 알까.

알프스의 세계적인 관광국, 국제적십자운동의 발원지, 시계의 나라 스위스가 자기들의 총리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는 그런 나라였나 싶다. 스위스는 국토 면적 4만㎢에 인구 900여만 명으로서 작은 나라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탓일 것이다. 총리를 비롯한 정치인들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피지 않아도 되는 사회현실을 의미하는 듯하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기에 이름은 몰라도 되는 정치의 실정을 말하는 것 같다. 이름을 기억하고 따질 것 없이 정치인들이 일을 바르게 잘 한다는 반증일 것이다.

설마 스위스의 정치판에 부정을 저지르고 막말을 쏟아내는 정치인들이 활개를 칠까. 민주주의라면 스위스도 앞서 가는 나라이다. 정치인들이 미더운 정치를 한다면 무엇 때문에 이름을 알려고 애쓸까. 사노라고 자기 일만 해도 바쁠 텐데. 자고나면 실정법을 어긴 비리가 뉴스거리가 되는데도 특권을 누리면서 세금으로 지급되는 고액의 급료를 챙긴다면 미움에 겨워서라도 정치인들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가는 의원도 있다. 고급정보를 알아내어 불법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여 언론에 오명이 오르기도 한다. 범법행위를 자행하여 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뻔뻔스럽게 의원행세를 하고 월급을 받는다. 편 가르기를 하여 제 편이면 목숨을 걸고 감싸지만 내 편이 아니면 원수를 만난 듯 맹공을 퍼붓는다.

내 편의 피고라면 사법부의 판결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내 편이 있을 뿐이다. 같은 행위도 그 행위의 주체자가 누군가에 따라 정의와 적폐로 갈라지는 것 같다. 허구한 날을 무리지어 입씨름을 하던 옛날 당파싸움이 생각난다. 싸움을 하다가도 기득권을 지키는 일은 똘똘 뭉쳐 감쪽같이 처리해 버린다.

보도를 보면 총리를 역임한 인사가 검은돈을 받아 옥살이를 했고, 전직 대통령들이 수인생활을 하는데 더 말해 무엇 할까 싶다. 그들의 죄에는 뇌물을 받은 죄목도 포함되어 있다. 제 이익을 챙기는 데에 이골이 난 정치인이라면 총리든 의원이든 성과 이름을 모를 수가 없다. 이름 석 자가 저절로 머릿속에 각인된다.

당선되기 전에는 제 한 몸을 나라를 위해 바치겠노라고 큰소리치지만, 금배지를 달고 나면 권력과 지위에 도취되어 권세를 누리고 그릇된 짓을 일삼는다. 그러고서도 입만 열면 ‘민생’과 ‘공정’과 ‘정의’를 외친다. 잘 살게 해 달라고 잠시 맡겨 놓은 권력을 거머쥐고 우월적인 권위의식에 사로잡혀 국민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실망을 넘어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감정적인 표현을 허여한다면 일부 여의도의 의원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본래의 할 일은 부업이고, 은밀히 권력을 앞세워 사익 챙기기가 본업이라고 말하고 싶다. 국민에게 감당 못할 스트레스를 주는 정치인들이 어느 나라에 또 있는지 궁금하다. 오죽하면 ‘이름을 분명히 기억했다가 다음 선거에는 기필코 낙선시켜야 한다.’고 벼르는 사회단체가 등장할까.

일부 정치인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자기네들이 이루어 놓은 듯, 특권을 누려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은 하지만 정의와 민주, 자유를 외치던 구호도 결과적으로 금력과 지위를 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성급한 의문마저 든다.

감정을 그대로 밝히면 일부 못된 정치인들을 혼내주는 귀신은 왜 안 오는지 원망스럽다. 이 땅 정치인들의 비리가 워낙 흔한 일이라 귀신도 기가 막혀 손을 놓아 포기한 걸까.

스위스의 정치인들은 우리의 일부 정치인들과는 애초 비교되지 않을 것 같다. 스위스 국민이 부럽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모든 정치인들이 신실하고 올발라 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날이. 정치인들이 인격이 훌륭하고 능력이 출중하여 이름을 몰라도 되는 꿈같은 날이. 기대는 하지만 숱하게 속아 본 터라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