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 (시조시인, 본지논설위원)

텔레비전을 그다지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나마 몇 몇 프로그램은 빼먹지 않고 즐겨본다.

연속극을 자주 보는 아내와 다르게 심심할 때는 채널을 돌리다가 멈추고 자세히 뜯어보게 된다. 지상파의 대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아침마당’과 ‘6시 내 고향’ 그리고 ‘우리말 겨루기’ 같은 것이다.

주말에도 ‘당나귀 귀’와 ‘1박 2일’같은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정으로 시청하고 있다. 더러는 토론프로그램도 즐겨보는 편이긴 하다. 즉 뚜렷한 하나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초등교단에서 출발한 교직생활에서 명퇴할 때까지 무려 38년 넘게 평교사로 살았다. 한때는 촉망받는 교사로 각종 임무를 해결하며 살았고, 취미였던 글쓰기에서 동호인 활동을 틈틈이 하다가 시조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모임을 주도하여 회장 역할도 수행하며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3남매를 키우며 집안 종손으로서 할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지난 세월이 그리 후회스럽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돌아볼 때 하나의 정체성으로 세상을 살지 못했다. 다중인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스스로를 지칭하는 수많은 대명사가 있었고,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느 한순간에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아직도 누구에겐 ‘00의 아들’이고 다른 누구에겐 아호인 ‘어안 시인’으로 불린다. 교직 선후배들에게는 아직도 ‘최 선생’일 뿐이다.

뭐라고 불리던 그 때마다 나의 마인드가 달라진다. 어떤 태도나 행동 때문에 ‘아저씨’나 ‘할아버지’일 때는 건강상태를 꾸미지 않아도 되니 괜찮다.

상대방과의 관계 또는 내가 빠져든 상황에 따라 우리는 매번 다른 호칭으로 불리게 되는데, 어떻게 불리느냐에 따라 정체성이 결정되니 참 신기한 일이다. 우리는 자기가 주인일 때와 손님일 때 정체성이 달라지는 게 보통이다.

주인일 때는 웬만하면 참고 이해하려 하지만, 손님일 때는 그러지 못하여 불편부당함을 느끼게 된다. 대개가 호칭에서 비롯된다.

‘아가씨’나 ‘아줌마’처럼 특정한 성향이나 차이를 부각하는 호칭들은, 설령 말하는 이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개개인의 인격을 지우고 상대를 부정적인 인상 속에 가두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렇게 시작된 대화가 끝까지 좋을 리 없다. 호칭 속에는 서로의 관계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식의 지평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말은 뒷말까지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들어서 곰곰 생각하게 되는 말이 바로 ‘손님’이라는 말이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며 그래서 오래 거주하지 않고 각기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 존재를 뜻한다. 한자로 ‘객(客)’이라고 쓰는 이 말은 참 많은 갈래를 가지고 있다.

결혼식에 갈 때는 하객이 되고 장례식에서는 조객, 문상객이 되니까 말이다. 똑같은 소비자인데도 은행에 가면 고객님이고 식당에 가면 손님이라고 불리는데 명칭에 따라 그들의 행동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샤머니즘에서는 사람에게 찾아든 병마조차도 ‘손’이라고 일컬으며 잘 대접해서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도 손은 잘 대접해야 한다는 의미가 섞인 것일 테다. 모든 손님은 부디 잘 머물다 가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세상에 주인인가, 아니면 손님인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 정작 이 세상에 잠시 다녀가는 우리 역시도 그저 손님에 불과할지 모른다. 손님이라면 원래 주인으로 살던 곳, 영원히 머물 수 있는 집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은 무수한 대명사를 버리고 온전히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곳이 어디일까. 아마도 무덤이겠지. 무덤이 반드시 땅 위에 있을 필요야 없겠지만, 푯말 하나는 남지 않을까.

아무리 손님이어도 머무는 동안에 지켜야 할 것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예의범절이라고 했다. 다른 표현으로 책임과 의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재의 나는 한 집안의 가장이고, 세 아이들의 아버지이며 네 명의 손자 손녀들의 할아버지일 뿐 아니라, 소속된 몇 단체의 회원이고 대한민국의 국민이며 우리 문단의 말석인 시조 시인이다.

그러한 온갖 명칭이 온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만큼 ‘손님’으로 온 이 세상에서 그동안 나누었던 사랑과 받았던 은혜를 감당하는 이름으로 여생을 버티어야 한다. 이제 내가 돌아갈 날이 그리 멀지 않았어도 사는 날까지는 몸과 마음이 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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