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애 (수필가. 시조시인. 본지 논설위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말과 글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타인과의 소통을 말과 글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가르치고 배우고, 글을 익히고 다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말이나 글에는 말하는 사람의 품격이나 인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평생 갈고닦아야 하지만 사실 세상과 소통하는 데는 기본적인 말과 글이면 대체로 충분했다. 그런데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육성만이 언어가 아니고 한글만이 글이 아닌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컴퓨터에서 지시하는 언어와 글, 손에 든 핸드폰에서 지시하는 언어와 글을 알아야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기기(器機) 속의 세상은 다룰 줄만 알면 재미있고 더 없이 편리하나 모르면 깜깜하고 답답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르고 익숙지 못할 수밖에 없는 나이라서 조석으로 발전하는 기기(器機)의 기능을 대면하며 살아야 하는 현실이 얼떨떨하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필요한 앱을 설치하지 못해 뻔히 알면서도 비싼 구매를 하는 실정으로 포기하자니 답답하고 따라잡자니 힘겹다.

기계속의 언어도 그렇지만 기계 밖의 세상도 만만치 않다. 쓰지 않던 용어가 난무하고 국적 불명의 원어나 줄이거나 급조된 언어들이 생활 속에 파고들어 일상이 되어서 화면에 휙휙 지나가는 글자가 한글이건만 글자의 뜻을 몰라 서로 묻는 형편이니 그야말로 뒷방에 갇히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상용하는 문장이 온전히 우리말로만 이루어진 문장이 얼마나 되나. 외래어나 외국어가 우리말 속에 버젓이 끼어 한 문장을 이루는 것은 다반사이고 그것도 반이나 차지하는 경우를 보는 것도 오래되어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문장은 고사하고 낱말에서조차 ‘리봄’처럼 괴상한 것이 생겼다. 다시 봄이 온다. 라는 신조어이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멀쩡한 우리말을 건너뛰기를 해서 새로운 유행어를 만들어 아무 생각 없이 재미나게 사용하는 풍조가 생기고 이를 경쟁하듯 한다는 것이다.

부동산문제에서 쓰는 ‘영끌’. ‘빚투’, 정치인들이 쓰는 ‘억까’. 패스트푸드에서 쓰는 ‘겉바속촉’. 요리에서 쓰는 ‘밥굽남’. 이런 류의 헤아릴 수 없는 말들을 정규 방송 중인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서 듣거나 화면을 통해서 읽을 때가 많은데 젊은이가 아니면 즉석해석이 곤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0년경에 싸이월드가 한창인 시절이 있었다. 컴퓨터 안에 있는 세상으로 보이지 않으면서 무한 넓은 세상이다. 싸이월드가 한창인 그즈음 컴퓨터가 막 확장되던 시기라 접근이 불편했고, 어려워서 꼭 필요한 사안이 아니면 그 앞에 앉지 않았으니 한 번도 싸이의 세상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싸이의 세상이 사라진 요즈음 갓 발간된 『아무튼, 싸이월드』라는 책을 읽어 보았다. 당시의 젊은이들이 얼마나 미지의 장래에 대해 불안에 떨었는지, 녹녹잖은 현실을 잊기 위해서 싸이에 접속해 위로받고 월드에 저마다 자기 집을 지으며 드나들었는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그러면서도 꿈을 세우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그 공간에서 헤맨 젊은이들의 방황과 야망을 단적으로 기술한 책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게 해준 싸이질을 지금은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한 젊은 작가가 대견해 그룹채팅방에서 작가의 모친에게 축하 인사를 보냈더니 ‘덕후 덕분’이라는 답이 올라왔다. ‘덕후’는 누구인가? 어느 마나님 택호 같기도 하고, 중국의 벼슬 명칭 같기도 한 ‘덕후’가 뭐 어쨌길래 싶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채팅방의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말인 듯했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열었다. ‘덕후’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에 깊이 빠진 현상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니 작가가 싸이에 빠졌었다는 뜻이다. 좋은 뜻의 중독이라는 말이다. 덕후는 일본어인 오타쿠(御宅)를 줄여서 (宅)만 남긴 말로 일본 발음으로는 다꾸가 되고 이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宅)은 당신의 높임말일 뿐인데 어떻게 댁이 중독의 뜻으로까지 변천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한 분야에 깊이 몰두하여 전문가의 열정에 이른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렇게 쓰일 말을 꼭 일본말에서 가져와야 했나. 일본의 신조어를 들여와서 우리말로 줄여서 버젓이 쓰고 있으니, 하다하다 별것까지 다 하는 이 상황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변화하는 언어의 세태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은 이쪽의 잘못으로 봐야 하는가,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자의 잘못으로 봐야 하는가?

어쨌건 소통하려면 언어의 변천에 꾸준히 적응해야 하니 남의 나라말을 줄여서 우리말처럼 쓰는 이런 일, 뇌 없는 백성들이 하는 짓 같은 어이없는 이런 일도 아무런 저항 없이 익혀야 하나. 우리가 이래도 되나? 왜 아무도 걱정을 하지 않는가? 사회적 숙제로 돌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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