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 (소설가·본지논설위원)

우리나라와 서양의 문화적 차이는 이어령 교수의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언론인 이규태가 지은 ‘한국인의 의식구조’을 읽으면 어렵잖게 이해할 수 있다.

이차대전 때, 전장을 누비는 병사들이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을 소중히 간직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이 책들도 한 때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서양의 문화와 의식세계를 쉽고 가까운 사례로써 명료하게 밝혀 2~30대의 독자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일례로 ‘춘향’과 ‘헬레네’를 대비하여 서양과 한국인의 여성관을 조명했다. 트로이 전쟁은 헬레네를 두고 트로이와 스파르타가 벌인 전쟁이다.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를 사랑하여 트로이로 함께 간 것이 싸움의 발단이다. 사랑의 도피 행각을 한 여성이 두 나라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흔한 말로 바람난 왕비 때문에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스파르타와 트로이는 헬레네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직 헬레네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연인을 따라간 왕후를 찾아오려고 전쟁을 벌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데려오기는커녕 폐위시켜 부모와 집안 친인척까지 크고 작은 죗값을 받을 것이다. 돌아오면 사약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오죽 여성을 비하했으면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이 생겼을까. 전쟁의 도화선이 된 헬레네로 미루어 서양의 여성에 대한 의식은 ‘여존남비(女尊男卑)’인 셈이다.

춘향은 헬레네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춘향이 일편단심으로 이몽룡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헬레네처럼 마음이 흔들린다면 사건이 입체적으로 전개되어 한층 더 긴장감을 자아내는 얘기가 된다.

헬레네는 트로이와 스파르타를 오갔지만 춘향은 자나 깨나 이몽룡을 사모하는 단조로운 평면적 인물이 되어 소설적 재미를 반감시킨다. 하지만 열녀를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생각하던 사회에서 춘향이 헬레네가 되기는 애초 불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동서양의 상반된 의식도 설득력 있게 파헤쳤다. 과오를 자행한 의심을 받는 사람이 억울한 나머지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경우이다. 우리라면 죄지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쳐내는 것은 물론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에 양심 바른 사람으로 미화된다. 억울한 죄를 벗어나기 위해 자결한 의로운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죽음이 생전의 죄를 지우고 두고두고 기릴 사람으로 변신하게 만든다.

하지만 서양이라면 그 죽음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자결하면 의심받던 죄를 인정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죄에 마땅한 벌도 받지 않고 가버린 비겁하고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죽음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억울할수록 살아서 끝까지 무고함을 밝혀야 한다. 결백을 밝히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한다. 서구의 시선으로 보면 누명쓴 자결은 죽음의 골짜기로 도피하는 행위이다. 동정을 받기는커녕 죄를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가방을 메고 서울 인근 야산에서 자결한 그 인사의 죽음은 떳떳한 행위가 아니다. 수도 서울의 최고위 행정책임자라면 자신을 두고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과오가 사실로 밝혀졌지만, 죄가 있다면 산으로 갈 것이 아니라 용서를 빌고 대가를 받아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누명을 실증적으로 벗겨 다시금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옳다.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기 있는 행위인데 죗값이 두려워 죽음을 도피처로 삼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민들 편에 선 청렴하고 진취적인 인사인 줄 알았다. 언젠가는 그 인사가 나라를 이끄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희망의 횃불이 되어 낮고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는 큰 인물이 되리라 여겼던 터라 그의 죽음이 한층 더 실망스럽다.

한 때 서민들을 위한 사회운동가였기에 그의 죽음은 거듭 이기적인 못난 행위로 생각된다. 권력의 갑옷을 입고 여성에게 저지른 비행을 되새기면 이중적인 태도에 배반과 흡사한 감정마저 든다.

죽음이 선량한 사람으로 둔갑시킨다고 믿은 것일까. 죽음으로써 허물을 씻고 정의로운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 걸까. 시민들이 권력자로서 그의 뒤에 도사린 과오를 훤히 알기에 책임도 사과도 마다하고 서둘러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렇다면 지도층 인사로서 어처구니없이 안이하다. 여권 실세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결백을 밝힐 수 없어 억울하여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구의 문화를 전제하면 그는 스스로 죄를 인정하고 산으로 간 겁 많은 죄인이 된다. 자결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짐작 못했을까. 그도 젊은 시절 이어령 교수와 언론인 이규태의 저서 몇 권은 읽었을 법한데 한 권이라도 읽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읽지 않았을까. 읽고도 기억하지 못할까. 몹시도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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