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권의 저서를 출간한 이정섭 선생

소설가 이정섭(64) 선생은 본의 아니게 여러 곳의 향우회를 나가는 사람이다. 안동 도산 출신으로 어린 시절 장수면 보통골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 그래서 사촌, 육촌 형제들과 친척들이 있는 도산면민회에는 집안 어른들의 성화로 가끔 나간다. 영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를 마친 관계로 자연스럽게 영주향우회와 영주중, 영광고 동문회에도 나간다. 또한 선친과 친형제들이 봉화 춘양면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관계로 그곳의 향우회에도 얼굴을 비추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영주향우회나 영주중, 영광동문회가 가장 마음이 편하고 아는 사람도 많아서 자주 나가게 된다고 한다. 또한 고향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영주가 고향이라고 말하고 이력서에도 출생지를 영주라고 표기하고 있는 영주사람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

그는 워낙 가난한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이라 고등학교를 졸업도 하기 전에 이미 장사를 시작하여 돈을 벌었다고 한다. 장수에서 중, 고등학교를 걸어서 다녔고 졸업도 하기 전에 생업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돈이 없어 고교 졸업장은 나중에 밀린 학비를 완납하고서야 찾아왔을 정도로 늘 생활에 쪼들렸다고 한다.


사업도 하고 중간에 공무원도 하면서 20여년을 보내다가 나이 마흔이 되어 갑자기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전업 작가의 길에 도전했다. ‘시대문학’과 ‘예술계’에 소설과 수필로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후에도 돈이 되는 꽁트를 주로 쓰면서 생업을 이어가야 했기에, 청탁을 해오는 모든 잡지와 사보에 500편 정도의 꽁트를 썼다.


‘늦게 등단했으니 잡 글은 쓰지 말라’는 스승 김동리, 오학영 선생의 뜻을 어기고 너무 많이 꽁트를 썼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수필과 소설에 전념하여 단편, 중편, 장편 소설, 수필을 100여 편 썼고, 경영 관련 실용서까지 합하여 30여권의 저작을 출간했다. 그 가운데 실용서인 <21세기를 준비하자>와 꽁트집인 <죽어봐야 저승 맛을 안다>는 1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 영주 출신의 소설가 이정섭 선생

소설, 수필, 꽁트 집 등 30여권의 서적 집필

문학생활 25년 간 30여권의 책을 집필했으니 과히 1년에 1권이 넘는 다작이다. 현재도 그는 종로 세운상가 빌딩에 위치한 집필실에서 하루 5-6시간 정도 글을 쓰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위와 장이 좋지 않았던 선생은 젊은 시절 늘 일에 치이고, 생활고에 치여서 애를 먹었지만, “최근 몸이 좋아져서 오랜 시간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 들어 집필에 바쁜 것이 너무 좋다.”고 할 정도로 늘 즐겁게 살고 있다.


그는 안동지역의 명문가인 진성이씨 집안 후손으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육사가 친조부의 10촌 동생이다. 또한 그의 이름 정섭은 육사의 친동생으로 한국 최초의 문학평론가이며 조선일보문화부장과 해방이후 월북하여 북에서 문부상을 지낸 이원조 선생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또한 한국 기독교의 거목인 영주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이원영 선생이 재종조부가 된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후손에게 주어진 가난과 압박은 어린 시절의 그를 상당히 힘들게 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에도 그는 꿈을 잃지 않고 공부와 글쓰기에 열중하여 오늘날의 소설가 이정섭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선생은 말단 공무원 생활과 사업가로 20년을 보냈고, 본격적으로 글쓰기에 전념한 지난 25년간, 주로 소설가, 수필가, 신문사 논설위원 등의 일을 하며 지냈다.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하면서는 ‘실명비판은 하지 않는다. 책이나 자료의 출처를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오랫동안 글을 써왔고 , 후배들에게도 그런 원칙을 가지고 글을 써주길 바랬다. 그래서 지금도 친한 신문사 후배들이 그의 원칙을 잊지 않고 글을 쓰는 것에 감사하다고 한다. 실명비판이 넘치는 혼탁한 세상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회갑이 지난 선생은 지금도 영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늘 영주중학교 동창생들에 대한 자랑을 많이 한다. 영주중학교 7회 동창생들은 지금도 그 어떤 후배기수들도 뛰어 넘을 수 없는 대단한 인재들이 많다고 한다. 당시 240명의 동기생들은 3대 1의 입시경쟁을 뚫고 입학을 하였고,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져 고교에 진학한 후 무려 120여명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 중에 소위 명문대학에도 40여명이 입학을 하여, 당시 최고의 명문 경기고에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진학 성과를 냈다. 그래서인지 그의 동기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권영창 영주시장, 박찬극 전 경북도의원, 홍사덕 전 국회의원, 송화선 전 영주시의회 의장, 강정훈 전 조달청장, 김동국 전 환경부 기획관리실장, 권순묵 전 현대자동차 부사장, 김재룡 전 한화증권 회장, 고 최병웅 용마건설 사장 등이 있다.

 

소수서원장이 되어 영주를 알리고 싶다.

지금도 동기들 모임은 잘되는 편이고, 자주 만난다고 한다. 한때 그의 사무실은 영주 출신의 출향인사들의 모임방 구실을 하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종묘 앞 종로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거의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며 글을 쓰는 관계로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고 연락도 잘되는 편이라 오후 4시만 넘으면 늘 술 한잔 하기 위해 하나 둘 모여드는 영주인들로 항상 시골 복덕방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재경 영주중, 영광고동문회 사무실도 겸하고 있었고, 그도 중심에 서 있었던 같다. 아무튼 그는 지금도 영주지역에서 벌어지는 행사며 모임에는 늘 자리를 빛내주는 인사이기도 하다. 지난 6월 말에는 동양대학교에서 열린 ‘선비문화세미나’에 주제발표를 위해 참석하기도 했고, 최근에도 문인협회, 소설가협회 모임이나 동창회에도 자주 불러 다닌다.


그는 앞으로 4-5년 정도 지나면 귀향하여 순흥의 소수서원장을 하는 것이 꿈이라고 한다. 영주의 유불선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홍보하는 일의 중심에 노역장수가 되길 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소설가다운 말과 글재주도 있고, 지난 시기 지역에서 공무원을 하면서 영주에 대해 배우고 느낀 것도 많고, 영남사림파의 중심인 진성이씨 독립운동가 집안 후손으로 영주를 알리는데 제격이라는 생각도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늘 뒤쳐져서 달리던 이정섭 선생은 현재는 몸이 아주 좋아져서 술도 한잔씩 하면서 선후배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많고, 글을 쓰는 시간도 늘어났다고 한다. “남은 생은 귀향하여 글쓰기와 고향을 알리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이 선생은 늦장가를 들어 서울의 동쪽인 천호동에 살고 있다. 자녀는 대학을 다니는 딸과 아들을 한 명씩 두고 있다.


(이정섭 선생 연락처 019-246-5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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