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출신의 시인 박시교
지난 5월초 향토 출신의 만화가 김판국 선생으로부터 한 장의 팩스를 받았다. 동창생인 박시교 시인이 가람시조문학상을 수상하니 취재를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시인 박시교에 대한 정보가 없던 상황에서 취재를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기사 작성을 위해 이곳저곳을 뒤적이다 보니, 박 시인이 스물여섯인 지난 197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와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했으며, '오늘의 시조문학상' '중앙시조대상' '이호우문학상'을 수상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불교 잡지 (유심) 의 편집 주간
또한 지난해에는 세 번째 시집 <독작>을 발표하여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찬사와 함께 문예진흥원이 지정한 2005년 우수문학도서로 인정받기도 했다. 봉화군 봉성면 원둔리 출신의 시인 박시교씨(61)는 가톨릭 신자지만, 백담사 주지 스님과의 오랜 인연으로 만해가 발행했던 불교잡지 '유심(唯心)'의 편집주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취재를 준비하며 시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에들러 시집 <독작(獨酌)>을 사 왔다. 술을 얼마나 좋아하기에 ‘혼자 술을 마신다’는 의미의 시집을 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독작>은 ‘나무에 대하여’라는 시로 시작이 된다.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사람이다/안으로 생각의 결 다진 것도 그렇고/거느린 그늘이며 바람 그 넉넉한 품 또한/격(格)으로 치자면 소나무가 되어야 한다/곧고 푸르른 혼 천년을 받치고 서 있는/의연한 조선 선비 닮은 저 산비탈 소나무/함부로 뻗지 않는 가지 끝 소슬한 하늘/ 무슨 말로 그 깊이 다 헤아려 섬길 것인가/ 나무도 아름드리쯤 되면 고고한 사람이다’
나무와 술을 즐기는 사람
문학평론가 한강희 선생은 "박시교 시인이 '사람 사는 마을에 사람보다도 나무가 많아야 한다'는 지론을 얻은 것 같다. 시인은 나무와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시작(詩作)과 생활의 미학'을 체득하고 있다.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생의 이면을 되돌아볼 이순(耳順)의 자재로움에 실린 정관(관조)으로 이해된다. 이는 시적 대상물에 대한 시인 나름의 심적인 거리가 그만큼 확보, 확장되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라고 평하고 있다. 이렇듯 박 시인은 늘 자연과 가까운 사람이고 자연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의 시집에는 그의 인생과 술, 자연, 사상이 두루 숨어 있었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만나야 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했다. 며칠 후 늦은 시간 인사동에서 선생을 만났다. “다리가 좋지 않아 잘 걷기 힘들다.”는 말을 하기에 ‘술병이구나! 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는 술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지만 당일은 술병이 심해서 약주 한잔하지 못하고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방동이인 그는 조금은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전쟁이 나면서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어머님과 아들 형제를 남겨두고는 월북을 하셨다. 그 이후로는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다고 한다. 봉성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는 늘 1등만 하던 박시인은 학비가 싼 안동사범 부속 중학교에 가길 희망했지만, 어머님이 어린 자식을 멀리 보낼 수 없다고 하여 가까우면서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영광중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다. 정말 늘 1등을 하면서 장학생으로 중학교를 마쳤고 학생회장도 했다.
이후 고등학교는 가톨릭 계통인 대구계성고를 희망했지만, 이번에도 어머님의 강력한 반대로 영광고를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입학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교를 얼마 다니지도 못하고 교통사고를 당해서 무려 3년간 병원신세를 지게 되고 학교는 자퇴를 하게 된다. 그래서 인지 그는 지금도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후 나이 스물이 넘어 어렵게 서울에서 고교과정을 마치고는 대학에 진학한다.

하지만 대학도 불편한 몸과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중퇴를 하고는 한국일보의 기자로 취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기자일이라는 것이 글만 잘 쓰면 되는 것이 아니고, 현장을 돌아야 하는 일이 많아 자신감을 잃게 되어 그만두게 된다. 이후 출판, 잡지사에서 오랜 동안 근무 하면서 글쓰기를 계속했다. 덕분에 젊은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을 했고, 좋아하는 출판, 잡지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또한 시인으로 추계예술대학에서 10여 년간 국어강사로도 복무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장이 없는 그가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월간 ‘마당’의 편집주간, 천재교육의 편집이사 등의 화려한 출판계 경력도 있었고, 다수의 수상경력과 함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때문이었다.
그는 최근 몸이 불편한 관계로 시작활동과 함께 불교잡지 편집 일만 하면서 수유리 집과 인사동 사무실을 이삼일에 한 번씩 오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터뷰 당일 인사동 사무실 근처에서 만나는 자리에는 한국 최고의 민족 시인으로 알려진 신경림 선생이 동행을 하기도 했다. 신경림 선생과는 워낙 오랜 친분이 있는 선후배 사이로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만난다고 한다. 이외에도 친분이 있는 문학계 인사는 승려 출신 시인인 고은 선생과 평론가 구중서씨 등이 있다. 아울러 오랜 고향 친구로는 영주에서 제재소를 경영하는 남상학씨와 대한생명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우경연씨 등이 있다.
부친이 좌익으로 월북을 하고 어머님 혼자서 어렵게 형제를 키운 탓인지 그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많이 표현했다. 그리고 연좌제로 고생을 했던 형님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했다. 그의 식구들로는 아직은 미혼인 중등학교 교사인 큰 딸과 회사원인 작은 딸이 있으며,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 중인 막내아들이 있다.
나무와 산이 좋아서 북한산 아래 수유리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다는 박시교 시인은 사람보다는 나무가 많아야 하고, 혼자 술을 즐기며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시인으로 보였다. 아픈 다리가 호전되면 조만간 다시 만나 소주 한잔 하자는 약속을 하고는 헤어졌다.
(박시교 시인 연락처 019-240-9465 )
서울 = 김수종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