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흥기 (소설가·본지논설위원)
20세기의 독재자라면 나치독일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를 꼽겠지만 20년대 초부터 30여 년 동안 소련을 통치한 이시오프 스탈린도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고 학살한 악명 높은 독재자이다. 1,500만 명, 많게는 3,000만 명을 숙청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회주의 소비에트의 최고 권력자로서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는 말살되고 생활수준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흉상과 동상을 건립하여 개인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우상으로 군림한 공포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연해주의 한인들을 한밤중에 모아 중앙아시아로 추방하여 희생시킨 독재자도 스탈린이다.
스탈린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유능한 의사가 치료할 수 없도록 막은 사람은 최측근 흐루시초프라는 일설이 있다. 비밀경찰의 실권자 베리아는 스탈린의 시신에 침을 뱉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충성을 바치던 측근과 부하가 자행한 소행에서 소비에트 권력층의 속성이 엿보인다. 베리아 역시 처형되었는데 음험하고 비밀 많은 ‘철의 장막’, 클레물린궁의 무자비한 권력자들의 실체를 알 것 같다.
광기에 사로잡힌 철권통치는 스탈린이라는 그의 이름 속에 숨어 있었던 것 같다. 언어는 그 언어 자체가 의미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예컨대 ‘도둑’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라는 뜻을 되새기지 않더라도 도둑이라는 말 자체가 의뭉하고 불순하다는 것이다.
‘풀’은 봄비 내린 언덕에 돋은 풀을 닮았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은 어휘 ‘별’과 상통한다. 하늘은 바위로 불릴 수 없으며 밥을 돌로 이름 지을 수도 없다. 말 자체가 의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돼지를 사슴으로 불러보면 어색하다.
돼지가 사슴이라는 날렵하고 고운 이름을 넘볼 수 있을까. 업신여겨 하는 말이 아니라 생김새를 보아 살이 찌고 주둥이가 튀어나온 먹성 좋은 동물은 돼지로 불려야 마땅할 것 같다.
스탈린은 러시아어로 쇠, 철을 뜻하는 스탈(Stal)에서 딴 이름인데 영어로는 강철, 스틸(steel)이다. ‘강철 사나이(Man of Steel)’, ‘강철의 대원수’는 스탈린의 다른 이름이다. 스틸 곧, 쇠가 어떤 물체인가. 때려 부서지지도, 굽혀 휘지도 않는다. 어지간한 고온에서는 녹지도 않는다. 좀처럼 다른 물질을 받아들이지 않아 더없이 배타적이다. 쇠의 성질을 사람에 견주면 철권을 휘두른 스탈린 같은 쇠뭉치 독재자가 딱 들어맞는다.
그런데, 스탈린이 평소 한 말에 ‘다수에 의한 결정’이 있다. 다수에 의한 결정은 민주주의를 거론할 때 등장하는데 세기적인 독재자의 입에서 나온 말로서는 뜻밖이다. 무슨 정책이든 공적 기관 다수의 구성원들로부터 동의를 얻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의한 결정의 제도이자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말은 흔히 듣는다. 하지만 다수에 의한 결정에는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는’이라는 수식어가 앞선다. 소수를 도외시한 다수의 결정은 자칫 다수의 횡포로 전락한다. 지구촌에서 국가 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나라는 없다. 한결같이 다수에 의한 결정을 근거로 삼는다.
다수에 의한 결정은 과정과 절차, 수단과 방법에 소수를 받아들일 때 민주주의를 보장한다. 우리가 경계하는 이념에 사로잡힌 북녘의 권력자도 자신의 뜻을 공식적으로 다수의 동의를 얻는 절차를 밟을 것이다. 하지만 일당체제에서 소수 의견을 드러내면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에 지리산의 파르티잔 염상진이 동지들에게 ‘당은 신성하고 순결하오. 비판도 이의도 있을 수 없소. 남조선의 국군과 경찰보다 배신자를 더 증오하오.’라고 말하는 대화가 나온다. 생각이 다른 사람은 변절자, 배신자가 된다. 다수의 행위가 저절로 정의가 되지는 않는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는 과정과 절차에 소중한 가치를 둔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근래 여당이 여러 사안을 다수를 앞세워 성급히 처리하는 모양새이다. 다수에 의해 결정하기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수에 집착하다가는 다수의 덫에 걸릴지도 모른다. 똑똑한 의원들이 다수의 함정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알만한 의원들이 왜 걸핏하면 다수를 내세워 소수의 의견을 외면할까.
다수에 도취되어 초심은 멀어져 가물가물하지만 무엇을 잃었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자기만족의 수렁에 빠지면 유익한 바른 말도 귀에 거슬려 적병을 만난 듯 공격한다. 다수의 힘만 믿으면 독주를 하고 독주하면 갈 길의 방향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국민이 소수 의견을 외면하는 다수의 덫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오만함일까. 소수를 존중하는 다수의 결정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자기기만일까. 오만이든 자기기만이든 국민의 뜻에 어긋난다. 소수를 따돌리는 다수당은 불안하고 두렵다.
선진국에는 뜻이 다른 정당들이 모인 연립정부도 있다. 소수를 아우르는 것이 다수당의 능력이다. 다수당과 소수당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을 맞추어 동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