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가 낳은 세계적인 서예가 석진원 선생
서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린 시절 집안 어른들이 쓰는 붓글씨가 대단해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나중에 나이가 들고 글을 잘 쓰고 못 쓰고를 판단하는 것에도 재능이 필요하고 상당한 노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잘 쓰는 것에도 대단한 애정과 땀방울이 숨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인가 대학 은사 분이 붓글씨에 조예가 깊다고 해서 한번 찾아 갔더니만, 동행한 친구가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하는 것들을 보면 글씨를 확대해도 축소해도 그 느낌이 동일하다”라고 했다.
단순히 힘과 기교를 담아 붓으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일정함과 간결함이 확대와 축소를 해도 차이가 없는 것이 좋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사무실로 돌아와 굵은 매직으로 몇 글자를 써서 확대복사와 축소복사를 몇 번 했더니 정말 글씨가 엉망이었다. 비율도 맞지 않고 느낌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로는 붓글씨를 한다는 사람, 특히 서예가들을 만나면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그는 남들이 한 번 하기도 힘들다는 대한민국서예대전에 입선과 특선을 여러 번 했고, 이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도 수차례 하면서 한국서예계의 거목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그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북경미술관에서는 한중 교류전과 섬서(西安)성미술관에서는 초청전을 가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 최고의 예술가들만 전시가 가능하다는 예술의 전당에서도 다섯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고, 고향 영주에서도 시민회관에서 영주가 생기고는 처음으로 서예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명성은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한국서예협회 감사 등 화려한 경력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봉직하기도 했던 대한주택공사 서예강사를 포함하여 배화여자전문대학 서예강사, 한국마사회 서예강사 등으로 출강하고 있기도 하다.
석진원 선생은 평은면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하망동에서 자랐고, 영주종고 상과를 거쳐 영광고에 편입해 졸업을 했다. 청소년기에 워낙 말썽을 많이 피우고 개구쟁이로 살아서 고교에서 4년간을 수학했다. 이 때문에 비단전을 경영하던 조부의 강압(?)으로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고, 30년 넘게 서예를 통해 자신을 다스리고 세상을 배웠다고 한다.

지난 1977년부터 88년까지 12년간 주택공사에 근무하면서도 꾸준히 서예를 했지만, 본격적인 서예를 하기 위해 88년 사표를 내고 서실을 마련했을 때는 가족들의 반대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 생각해 보면 인생은 도전이기에 18년 전의 모험이 인생의 앞길을 확정짓는 큰 기회가 되었다고 했다.
현재는 상계동의 서실과 삼성동의 집을 오가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고, 몇 군데 강의를 나가면서 서예에 관심이 있고 조예가 있는 사람들과 친분을 다지고 있다.
선생의 마지막 꿈은 고향에서 영주 출신의 후학을 가르쳐 보는 것이라고 한다. 가능하면 모교인 영광고에 상설 서예실을 마련해 재학생 후배들은 물론 영주, 예천, 봉화, 안동 등지에서 서예에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언제라도 와서 배우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서예가 불량스러웠던 한 청년을 세계가 알아주는 예술가로 만들어 준 것을 보면, 열심히 살고 한 분야를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테니스와 약주를 무척 즐긴다는 선생과 점심시간 반주를 한잔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서예가 석진원 선생 연락처 011-237-4858 )
서울=김수종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