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영주人터뷰[16] 하망동 서울수예사 허옥애 대표

하루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도 더해진다. 우리고장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이어왔을까. 평범하게, 때로는 남다르게,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하려한다.[편집자 주]

지역의 변화와 함께 수예로 50여년 한길만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추억어린 장소로 남아

오래 장사를 하다 보니 듣는 것들이 많았죠. 살아보니 잘난 사람, 못난 사람도 없더라고요. 사는 것은 다 똑같아요

하망동에 위치한 서울수예사 허옥애(74) 대표는 수예로 5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길만 걸어왔다.

시장 속 왁자지껄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 허름하고 작았던 상가들이 나름의 번듯한 건물로 바뀌는 모습, 흙먼지가 날리던 길이 깨끗하게 포장돼 많은 차들이 오가는 모습들까지 영주의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화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뜨개를 손에서 놓기가 쉽지만은 않다는 허 대표에게 지난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울 새댁의 영주 살이

허 대표가 태어난 곳은 함경북도 구성군 동산면이다. 조부모와 함께 살다가 6.25전쟁이 시작된 후 아버지의 등에 업혀 3살 때 서울로 피난을 왔다가 다른 가족들과 영영 헤어지게 됐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금방 괜찮아지겠지 해서 오빠를 두고 부모님이 나만 데리고 내려왔는데 마지막이 됐어요. 오빠이름이 허용남이에요. 당시 6살쯤 됐지 싶어요.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길이 없어요. 친정엄마가 아들을 찾으려고 이북의 창에 몇 번 나왔는데 찾을 수 없었어요. 다른 사람은 다 찾았는데...”

이후에도 아무 소식을 들을 수 없어 가족들은 살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서울에서 숭의여중, 수도여고를 나온 허 대표는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1차 시험에 붙었으나 2차에서는 떨어져 낙담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운명의 장난처럼 모든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그러다 영등포에서 이발소를 운영하던 남편을 만나 평생의 동반자로 인생을 함께하게 됐다.

“21세에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예천으로 내려왔어요. 2~3년 정도 살다 남편이 영주에 있는 연초 제조창에 다니게 됐지요. 그렇게 영주에 정착해 살게 됐어요. 처음 영주에 왔을 때는 살집이 없어 세를 살았는데 이후에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죠. 그땐 참 힘들게 살았어요

뜨개 교재 직접 만들어

아는 사람도 없는 영주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해 나가려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던 허 대표. 그녀는 지난 세월을 회상하면서 진짜 열심히 해서 돈을 벌었어요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는 수예사를 열게 된 계기를 전했다.

중학교 다닐 때 그래도 나름 전교 10등 안에는 들었는데 뜨개를 하면 덜한 것을 내니 평균점수가 내려갔어요,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이후에는 어떻게든 완성을 해서 내다보니 뜨개 실력이 늘어나 잘하게 됐어요. 그것이 동기가 된 것 같아요

50여 년 전 당시에는 혼수로 뜨개를 해갔다는 허 대표는 앞치마, 이불깃, 베갯잇, 방석 등을 해서 팔면 돈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그나마 돈이 적게 드는 수예를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는 한쪽에 진열장을 놓고 베갯잇, 앞치마, 이불깃, 방석 등을 걸었다. 작은 가게지만 물건이 많아 보이게 하려는 나름의 노하우였단다. 물건을 많이 놓을 수가 없어 2만원 어치씩 주문을 했다. 진열해 놓은 것을 다 팔면 다시 걸어놓고 팔기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지금 가게 뒤에서 했어요. 가게가 앞이 넓고 뒤가 좁은 모양이었는데 절반으로 잘라 넓은 쪽은 가게로 하고 뒤는 방으로 해서 살았죠. 그렇게 힘들게 살면서 아이들이 연탄가스도 많이 마셨어요. 이후에는 시장슈퍼 자리로 옮기고 대림상회 옆에서 살림집을 했었는데 대림상회를 내놓아 그곳까지 수예점을 넓혔지요

30년 전 허 대표는 당시 선희네 수예점인 지금의 가게를 인수한 후부터는 정말 장사가 잘됐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게인수 당시를 회상하면서 한양상회 주인아저씨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허 대표는 자신의 가게를 운영할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계약금 내고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 모았지만 잔금 치를 100만원이 없어 울 수밖에 없었단다. 물건은 가득 나와 있는데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한양상회 아저씨가 가계수표를 내어 줬다고 한다.

한 달 내로 갚는 조건으로 해줬는데 너무 고마웠지요. 그래서 열심히 일해 돈을 갚았지요. 고마운 마음은 전했지만 말만이 아닌 물질적으로도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는데 그때는 자식들 6남매와 살아가려고 열심히 일만하다보니 무언가를 해주지 못했어요. 그렇게 살다보니 시간도 흐르고 아저씨는 돌아가셨지요. 지금까지도 아저씨의 도움은 잊을 수 없어요

영주에서 공부한 여학생이라면 꼭 한번쯤은 방문하는 곳이 서울수예사였다. 그때는 중학교 1학년 가정시간에는 앞치마, 2학년은 가리개, 이불깃 등을 학교에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허 대표는 학생들을 위한 뜨개교재를 만들어 중고등학교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단체로 구입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권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잘 봐달라며 전할 돈도 없으니 직접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길 밖에는 없었단다. 20대부터 40대가 될 때까지 허 대표의 이런 노력은 계속됐다.

수예로 돈을 벌기가 힘들어 아기를 업고 다니며 물건을 하고 밤낮으로 수예도 해서 15녀를 키웠어요. 남편이 돕는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죠. 그때는 참 열심히 온갖 힘을 쓰며 살려고 노력했지요

시내의 변천과정 살펴봐

학생들 교재도 많이 내고 가게에서 날염도 찍어 조금씩 돈을 벌기 시작했다. 유행에 맞는 것, 새로운 것을 구상해 전시판매도 하고 주문이 들어오는 것도 손님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

수예 뜨개의 산 증인이라면 증인이라 할 수 있지요. 뜨개하면서 돈을 번 사람은 없어요. 재주도 있어야지만 뜨개에 대한 애착이나 오랜 열정도 있어야 해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 팔이 아파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내 형편에 뜨개할 만큼은 주문이 들어와요. 놀 시간은 없어요. 최근 1년간은 남편이 아파 가게를 제대로 못 열었더니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줄었네요

인터뷰 날, 색이 고운 실로 뜨개를 하고 있어 무엇을 뜨는지 물으니, 남은 실로 모자 뜨고 있다고 했다. 잠깐이면 완성된다면서 작품을 만들 때는 스웨터가 10, 오버는 15, 조끼는 5일 정도 걸리고 패턴이나 굵기에 따라 시일이 다르다고 했다. 남자조끼를 주로 많이 뜨고 선물용이나 차를 교체할 때 내부 덮개용으로 주문을 한단다.

시중에 없는 특별한 실과 색상 3가지로 반코트 형식의 오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는 허 대표는 50만원에 제작했는데 잘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내가 뜨개해서 팔았던 옷들은 보면 한 눈에 알아봐요. 가끔씩 지나갈 때 보게 되면 잘 입고 다니는구나하고 생각하죠. 뜨개는 옛날이 좋았어요. 지금은 점점 수요도 많이 줄고 배우려는 사람도 드물어요

뜨개방은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었고 각자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름을 달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고 허 대표는 말했다.

인근 가게 중에는 가장 오랜 시간 주변의 변화되는 모습을 봐왔던 허 대표는 현재 몸이 아픈 남편과 함께하며 가게 문을 열고 있다. 사람들이 이제는 편하게 지내라고 말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해오던 뜨개 일을 힘들다고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가게에 사람이 많다고 매번 사러오는 사람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에요. 5명이 앉아있으면 2명은 물건을 팔아주고 3명은 배우려고 앉아 있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물건을 사러온 사람들만 와요.

젊을 때 열심히 일하고 6남매를 키우며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들 사회에서 터를 잘 잡고 살고 있어 큰 걱정은 없어요. 개인적으로 한 가지 바람은 건강과 상황이 되면 더 늦기 전에 나를 위한 보상으로 세계여행을 떠나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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