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영주人터뷰[4] 풍기읍 조기환 씨

하루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도 더해진다. 우리고장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이어왔을까. 평범하게, 때로는 남다르게,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하려한다.[편집자 주]

늦은 배움, 대학졸업장 받고 공부는 계속
항상 새로운 도전으로 인생 즐거움 찾아

새로움은 희망과 기대감을 갖게 한다. 때론 걱정과 근심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이루고자 하는 바람과 긍정의 힘이 더해지면 꿈은 현실로 다가온다.

어려움 속에서도 도전과 열정으로 삶을 살아온 조기환(75. 풍기읍 금계리).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늦깎이 학생이 돼 대학졸업장을 품에 안기까지, 그리고 또 다른 도전을 이어온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어려움 줄이려 타지로
전남 순창이 고향인 그는 3살이 되던 무렵 아버지를 잃었다. 그래서 그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6.25전쟁이 발생하고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셨던 아버지는 빨갱이의 타겟이 되면서 가족들은 몰래 정읍으로 이동해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홀로 10명의 가족을 돌봤어요. 조금이라도 가정에 보탬이 되려고 고민한 끝에 먹는 것만 해결해도 좋으니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당시 6.25전쟁 이후라서 보릿고개시절이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되지 않아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였지요

어렵게 서울로 올라온 그는 청계천에서 일을 시작했다. 20대에 들어선 그는 아끼며 돈을 모았고 30대에 들어서서는 철재 등 건설자재를 판매하는 자신만의 가게를 열었다. 열심히 일한 만큼 가게는 자리를 잡아가며 번창했다.

사업적 능력과 아이디어가 많았던 그는 벤처기업을 설립해 서로 상생하기 위한 협력을 이어갔다. 서울의 한 벤처기업에 있을 때는 기름보일러 청소제를 개발했으나 대표가 아이디어가 있어도 영업능력이 부족해 그를 서울 총책임자로 맡겨 판로를 확대해 나갔다.

당시 정부에서는 기름보일러 청소주간을 시행해 개발한 청소제가 인기를 끌어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도 했단다.

“1990년대부터 2005년까지 사업은 성황이었어요. 그때 나이가 50대 전후였어요. 그 제품을 강남 코엑스에서 여러 번 전시도 했어요. 고생 끝에 행복이 시작됐다고 생각하며 신나게 일을 해왔는데 IMF가 터졌어요. 사업도 어려워져 일을 이어가기 힘들어졌지요
 

정원을 가꾸고 있는 모습
정원을 가꾸고 있는 모습

인생2모작 위해 찾아 온 영주
그는 사업이 성황을 이룰 때 전국 20여 곳을 선정해 땅값이 높지 않았던 3~4곳에 토지나 산을 구입해 놨었다. 그 땅은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때 삶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인생2모작을 위해 60대 초반에 영주로 내려왔어요. IMF때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팔고 남았던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에요. 30여 년 전, 친척의 말을 듣고 높지 않은 값에 땅을 구입했지요

옛날부터 산이 있고 물이 흐르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해왔었다는 그는 이곳이 이렇게 좋은 곳인지 당시에는 몰랐었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이 되고 복잡한 서울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남은 여생을 조용한 곳에서 보내려고 전국으로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친구가 나에게 네가 찾던 곳이 풍기 금계리 아니냐라고 말하더라고요. 다시 둘러보니 이만한 곳이 없었어요

그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산책을 즐기는 장소인 금계정이다. 골짜기 물이 흐르는 주변은 참 아름답고 운치가 있어 어느 곳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년 없는 일 찾고 집도 지어
사업을 해왔던 그였기에 제2의 인생은 정년이 없는 직업을 찾았다. 바로 산양산삼과 관련된 일이었다. 산양산삼에 대해 배우기 위해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부석면에 있는 한국임업진흥원 산양산삼산약초 홍보교육관에서 강진하 이사에게 전문노하우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산약산삼을 하니 자연친화적으로 집도 짓고 싶었다는 그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노래를 잠시 부른 후 이 가사처럼 집을 짓고 싶었다고 했다.

나는 삽질을 할 줄 몰랐어요. 노동과 관련한 것은 전혀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내 손으로 집을 지어보고 싶었어요. 영주에 정착해서 집을 지으면서 막노동을 해보게 됐네요

그는 3년에 걸쳐 집을 지었다. 전문기술 외에 모든 작업을 직접 했단다. 벽도 40cm로 두껍게 만들었다. 직접 해서인지 집의 모양이 없다지만 집에 대한 애정은 남달라 보였다.

최근에 집 주변으로 여러 나무와 꽃을 심으며 조경을 시작한 그는 전혀 모르는 조경을 배우기 위해 풍기읍내로 나가 집들을 둘러봤다고 한다. 그리고 유독 조경을 잘해 놓은 집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흔쾌히 허락하고 나름의 노하우도 알려줘 배울 수 있었다.

풍기 금계리에 정착해 흙으로 집을 짓는 모습
풍기 금계리에 정착해 흙으로 집을 짓는 모습

간절한 배움, 영주청년학교에서
그는 32녀 중 넷째로 어려운 생활로 배움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려운 시기였지만 어머니는 그를 가르치려 하셨고 다행히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다.

못 배운 것 때문에 항상 배움의 갈증이 있었어요. 서울에서 일하며 조금만 전문적인 지식을 알고 있었더라면, 조금 더 배웠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지요. 식당배달을 갔다가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그날은 잠을 들 수가 없었어요. 배움에 대한 한 때문이죠

항상 배움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그는 영주에 내려온 후 시내를 지나가다 우연히 현수막을 보게 됐다. 영주청년학교 현수막이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바로 현수막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만교 교장은 그가 궁금해 하는 부분에 대해 세심하게 알려주면서 늦은 나이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며 힘이 있는 말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7년 전 일이다.

서울에서는 바쁘게 살았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어요. 영주에 내려와 여유를 찾으니 청년학교 현수막도 눈에 들어왔지요. 수업시간보다 빠른 오후 2시에 가서 공부했어요. 그렇게 공부해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지요. 졸업장을 받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이후에도 공부를 더하고 싶었고 대학생도 되어보고 싶었죠

경북전문대학교 사회복지과에 들어간 그는 젊은 학생들과 공부하며 많은 것들을 배워갔다. 동양대학교 경영학과에 편입한 후에는 경영과 관련한 전문지식을 배우면서 이 내용을 예전에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여러 번 들었다고 한다. 사업을 하면서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그였기에 공부에 더 열중할 수 있었단다. 그렇게 올해 그는 동양대를 졸업했다.

대학공부를 마쳤을 때 큰 소리로 외치지는 않았지만 나도 이제 대학졸업생이다라고 속으로 크게 외쳤어요. 올해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대학원이 동두천에 있어 내년에는 도전해 보려고요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자원봉사활동 참여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자원봉사활동 참여

끊임 없이 도전하는 삶으로
도전하는 삶이 좋다는 그는 50년 동안 냉수마찰을 하고 30년째 산을 다니는 것이 건강비결이라고 했다. 산을 다니면 편안한 장소에 대한 느낌이 있는데 영주가 그에게 그런 곳이다.

어릴 적 친구가 함께 영주에 왔는데 정자나무 밑에 물이 흐르는 이곳이 내가 찾던 곳이라고 했어요. 이곳이 명당 중에 명당이었고 10승지라는 사실도 알게 됐어

그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세심하게 살피고 사업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열린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새로운 도전에 스릴을 느낀다는 그는 지금도 가슴이 뛰는 것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5년 전 홀로 배당여행을 떠나 동유럽, 러시아 인근, 동남아 등 50개 나라를 다녔어요. 2015에는 경북문경세계군인체육대회에 봉사자로 참여해 활동했고 이 경험을 토대로 2018년에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봉사자로 참여할 수 있었죠

대학에 들어가서 스스로 꼰대 소리는 듣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수업에만 집중했다는 그.

사회복지과에 들어가 젊은 세대와의 교류로 생각과 대화의 폭이 넓어지고 손자들과의 유대도 좋아졌다면서 무조건 쉬는 것보다 여유를 찾으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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