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6.25 70주년 참전용사 이야기]

북진기념 압록강물 수통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북진기념 압록강물 수통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38선 경계 중 6.25발발,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 그리고 후퇴
19491월 육군지원, 5038선 경계근무 중 6.25 발발

음성전투 첫 승리-신령전투 파견상-압록강 초산까지 진격
중공군에 포위-초산 탈출-지옥 같은 묘향산서 22일간 잠행

올해는 6.25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지난 656.25 특집기사 준비를 위해 한국무공자수훈회 영주지회를 찾았다.

김종규 사무국장은 매주 수요일 수훈회가 열린다안정면 조개섬(동촌2) 출신 박수항 용사님을 만나보면 실감 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68~14일 박 용사를 만나 6.25 발발에서 휴전까지 이야기를 들었다.

박수항 용사(6.25참전 무공수훈자)
박수항 용사(6.25참전 무공수훈자)

1949년 대한민국 국군이 되다
박수항(91, 가흥2)1930124일 안정면 동촌2리 조개섬(蛤島里)에서 태어났다.

이 마을은 밀양박씨 집성촌으로 증병조참판을 지낸 박지(朴墀 ,1474)가 처음 터를 잡은 후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박수항은 청제공파(淸齊公波) 15세손이다.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어 국군창설을 위한 모병이 시작될 때 청년 박수항은 대한민국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19491월 지원했다.

박 용사는 당시 충주에 있는 육군 6사단 7연대 신병교육대에 입소하여 군인이 됐다교육시설은 일제가 남기고 간 낡은 군복과 군화, 식기, 침구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195017연대는 춘천으로 이동하여 38선 경계임무를 부여받았다. 3대대 10중대는 경계근무 투입에 대비해 소정의 교육훈련을 받은 후 교대로 전방근무하게 됐다. 박 용사 부대는 중부전선 가평군 북면 소재 최전방 38선에 배치됐다.

박 용사는 근무지에 가보니 38선 표지도 철조망도 없었고, 능선 따라 파놓은 참호만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잠잘 막사도 없었다. 부대원 30명은 참호 위에 나뭇가지를 걸쳐 만든 움집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면서 경계근무를 했다고 말했다.
 

38선 경계근무 때 부대원과
38선 경계근무 때 부대원과

38선 경계근무 중 6.25발발
1950624일 경기도 가평군 북부 산악지대 38선은 평온했다.

박 용사는 이날 부대원들은 지형 정찰과 북한군의 이상한 동향(이동집결)을 살펴 상부에 보고했지만 군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 채 6.25가 발발됐다면서 그날은 폭우가 쏟아졌다. 무전병으로부터 전쟁발발 소식이 전해졌다. 소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사격명령이 내려졌다. 포 소리 총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전쟁이 났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전혀 대비가 없었던 우리소대는 준비된 북한군 1개 중대에 속수무책으로 방어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소대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밤 새워 암흑 속을 헤매야만 했다. 이튿날 우리가 가평 중대본부에 다다랐을 때 벌써 북한군 선두가 탱크를 앞세우고 가평시내로 들어오고 있었다.

중대장의 후퇴 명령이 내려지고 부대는 트럭을 타고 횡성을 지나 음성으로 이동했다.
 

한국전 최초의 승리 음성전투
195074, 부대는 음성에 도착했다. 7일 음성 동락초 여교사가 북한군 연대 병력이 학교에 주둔해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제보에 7연대는 긴급 작전에 돌입했다.

박 용사는 우리 소대는 북한군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7연대 병력이 학교를 포위하고 기습공격을 하니 북한군은 우왕좌왕 지리멸렬 상태가 되어 대승을 거두었다“6.25 전쟁사에서 국군 최초의 승전지가 음성지구(감우재)전투였다. 당시 육참총장이 현지에 와서 6사단 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과 부대표창을 약속했었다고 말했다.
 

신령전투 파편 흔적
신령전투 파편 흔적

치열했던 낙동강(신령) 전투
그 후 후퇴는 계속됐다. 거듭된 후퇴로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7연대는 경북 신령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박 용사는 부대재편으로 60미리 박격포 사수가 됐다. 매일 전투는 치열했고 쌍방 피해가 많았다.

8월 어느 날 박격포 사격을 준비하던 중 적의 포탄이 가까이 떨어지면서 파편이 이마에 박혔다. 자욱한 연기 속에 이마를 더듬으니 끈적한 피가 만져졌다. 얼마 후 위생병이 피투성이가 된 내 아마에 아까징끼(머큐로크롬)를 발라주고 붕대를 감아줬다. 박 용사는 기자에게 이마를 보여주면서 이게 당시 파편 자국이라며 전쟁! 참 참혹했다고 말했다.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7연대 병사들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7연대 병사들

 

압록강 국경 초산까지 진격
8월말 어느 날 취사를 보급하는 민간인이 와서 “UN군이 대규모 북진 공세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전했다. 그 말에 부대원들은 희망을 가지게 됐고 사기는 충천했다.

박 용사는 그 후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의를 상실한 북한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9월말) 우리부대는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노랫말처럼 트럭을 타고 북진길에 올랐다.

10138선을 돌파하고 철원, 원산을 지났다. 1020일 덕천에서 육본으로부터 국경선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우리는 희천과 온정리를 지나 압록강을 향해 진격 또 진격만 했다. 이때도 우리 7연대가 선봉에 섰다고 말했다.

7연대는 25일 오후 630분경 초산 점령에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국경선까지 약 30km 거리를 남겨두고 있었다.

51년 12월 양평전투 때
51년 12월 양평전투 때

압록강물 수통에 담아
10261415분경 선발부대가 압록강변에 발을 내딛고, 강변 언덕에 태극기를 꽂으면서 환호했다. 그리고 북진 기념으로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기도 했다.

박 용사는 국군과 UN군이 낙동강전투에서 승기를 잡고 반격을 개시한 후 약 40여 일간 쉴 틈 없이 진격하여 얻은 결과라며 그래서 나중에 우리부대 이름이 초산부대로 명명됐다고 말했다.

중공군에 포위, “살아서 돌아오라
승리의 기쁨도 잠시! 6사단이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국군과 UN군이 국경을 향해 진격만 계속하는 동안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 은밀히 산속 깊숙이 숨어들었던 것이다. 6사단은 결국 연대별로 흩어지게 되었고 병사들은 각자 살아남기 위한 탈출을 시도하게 됐다.

박수항 용사의 영화 같은 탈출 이야기는 이렇다.

현 위치는 묘향산 깊은 산속이다. 우리 중대는 10개조로 8-10명씩 분산 탈출을 시도했다. 중대장은 행운을 빈다. 부디 살아남아 덕천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낙하산으로 보급 받은 실탄과 식량 며칠분이 있을 뿐지도와 나침반에 의지해 남으로 향했다. 도로와 민가를 피해 험한 산길을 택했다

51년 1월 양구지구 전투 때
51년 1월 양구지구 전투 때

목숨 건 탈출-22일간 잠행
11월의 묘향산은 얼음이 얼 정도로 추웠다. 바위틈에서 가랑잎을 이불삼아 새우잠을 잤고, 먹을 것은 민가에서 훔쳐온 옥수수 몇 자루뿐이다. 어느 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외딴집에 접근했다.

숨을 죽이고 방문을 열고 들이닥치니, 먹을 것을 구하러 온 북한군과 맞닥뜨리게 됐다. 마침 북한군은 비무장이어서 불상사는 없었다.

북한군과 옥수수를 나누어 먹기는 했지만 그들의 신고가 두려워 즉시 그 지역을 벗어나야 했다.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적의 추격으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청천강변에 이르렀다. 이제 강만 건너면 덕천이다.

덕천에 연대본부가 있기 때문이다. 선발대가 강변 접근을 시도하자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급히 산속으로 숨었다. 이 때 선발대로 나갔던 전우는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청천강을 건너 드디어 아군을 만났다. 묘향산 지옥 잠행(潛行) 22일만이다. 그러나 우리 중대원 180명 중 15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미리 가서 기다린다던 중대장은 우리보다 3일 뒤에 돌아왔다. 끝까지 돌아온 중대원은 50명에 불과했다. 6사단은 병력지원을 받아 사단을 재편한 후 묘향산 철수작전을 펼쳐 무사히 한강 남쪽까지 후퇴했다.
 

1952년 여름 어느 날 점심시간에
1952년 여름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지도를 보면서 초산전투 설명
지도를 보면서 초산전투 설명

그의 가슴에 화랑무공훈장이
초산으로 진격할 당시 앞만 보고 내달리던 6사단 7연대의 용맹했던 모습은 초산전투 승리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결국 중공군의 반격으로 진격을 멈춰야 했다. 비록 초산전투는 아쉬움이 많은 전투로 남았지만 국민의 영원한 꿈이었던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압록강까지 나아갔던 우리군의 노력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5사단 양양대대 근무 때 주번하사
25사단 양양대대 근무 때 주번하사

박 용사는 533월 제25사단 70연대 3대대 본부중대 선임하사로 전속되어 임무를 수행하다가 55215일 전역했다. 노병의 가슴에 화랑무공훈장, 유엔참전기장, 6.25종군기장, 대한적십자기장, 공비토벌기장 등이 빛나고 있다.

박수항 노병은 아직도 북침이냐? 남침이냐? 헛소리 하는 사람이 일부 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라며 피로 지킨 우리 강토에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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