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영주人터뷰[2] 풍기읍에 사는 가족상담가 백광천 씨
하루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도 더해진다. 우리고장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이어왔을까. 평범하게, 때로는 남다르게,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하려한다. [편집자 주]
다문화가족과 소외계층에 따뜻한 손길 내밀어
삶의 힘 얻도록 부모교육 통해 이야기도 나눠
살아가기 힘들고 더없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다정한 말을 건네며 따듯한 관심과 보살핌으로 함께 한다면 어떨까.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갈 어린 아이들과 마음을 다친 어른에 이르기까지, 몸과 마음이 빈곤한 이들을 위해 마음 치유로 다가서는 사람이 있다.
함께하며 이겨낼 수 있는 삶의 힘을 전하는 가족상담가 백광천(50). 그녀가 풍기읍에 자리를 잡고 지내온 삶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어른들로 인해 아이들이 받는 상처
용인에 살던 백 상담가는 동양대 교수로 온 남편을 따라 12살, 7살 아들과 함께 7년 전 풍기읍에 정착했다.
그녀가 가족상담가로 활동하게 된 것은 둘째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학교의 도서관 자원봉사와 학교폭력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충격에 가까운 일을 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의 일이에요. 도서관 옆에 1학년 교실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한 아이의 머리를 때리고 바닥에 내리치는 모습을 봤어요. 너무 놀랐죠. 그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물건을 대하는 것 같이 행동했어요”
어느 날은 아이들이 수업시간인데도 울면서 교실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도서관에 머물렀단다. 그녀는 그 교사가 몸에 밴 억압과 통제로 아이들을 대했다고 했다. 그때의 내용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7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있다.
“당시에는 선생님도 이상하고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도 무방비 상태로 이상하게 느껴졌지요. 그 이상함은 내가 도시에서 살다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격적으로 억압과 통제가 몸에 밴 상태로 행동한다는 것과 아무도 그런 것이 문제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놀랐어요.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했죠”
백 상담가는 자신만의 느낌이거나 지역에 적응해가는 과정이라고도 생각했지만 무언가 문제점을 검증할 만한 과정이 필요해 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사회복지를 배우기 위해 평생교육원에 등록했다는 그녀는 사회복지자격증, 건강관련 자격을 취득한 후 대학원에 들어가 계속 공부하기 시작했다.
교사로부터 비슷한 대우를 받는 아이들을 본 후에는 처음 마주했던 다문화가족 아이의 집을 2년 동안 매일같이 방문했다. 아이가 혼나지 않는 방법은 글씨를 잘 쓰는 것이었고 그 아이가 슬프면 함께 지내는 자신의 아이도 슬플 수 있기 때문에 관심을 기울게 됐단다.
“한글을 가르치는데 아이의 감정이 노트 위에 다 드러나더라고요. 안타까웠어요. 아이의 어머니는 마음도 착하고 고운 사람이었는데 한국에 온지 10년이 됐지만 가정환경은 열악해 밤낮으로 돈을 벌기 바쁜 상태였고 자신의 아이가 부족하니 그렇게 당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어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죠.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지요”
26살 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학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백 상담가는 결혼하고 자신도 영국에서 2년, 일본에서 2년을 살면서 다문화가족의 입장으로 생활했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단다. 그렇게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초등 4학년 때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공동체 일원으로 함께 살아가다
동양대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서 정신보건에 대해 공부를 마친 백 상담가는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처음 풍기읍에 지역사회보장협의체 구성에 위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이 도울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며 정신보건에 관심이 있고 정서적 지지와 관련된 일은 적극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전문가적인 검증이 없으면 이야기를 해도 공정성이 없다고 생각했고 협의체에 몸담고 있으면서 사회복지나 현장에 대해서도 모르고 이름만 올려놓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1년 반을 활동했죠”
협의체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놀이학교를 진행한 백 상담가는 장애, 특수아동, 비장애아동이 함께 어울리며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직접 운영했다. 하는 동안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며 보람은 컸다. 그리고 2017년부터 1년은 협의체의 지원으로, 이후부터는 개인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을 관리해 왔다면서 기억에 남는 사례를 전했다.
6년 전, 전교 1,2등을 하며 정치외교학과에 가서 나라의 구조를 바꾸고 변화시키고 싶다는 야망이 있는 고교1학년 학생에 대한 이야기였다. 집이 갑자기 어려워진 학생은 이사를 가면서 심적인 부담에 암까지 걸렸다. 수술비가 없는데 행정적으로 지원대상도 받을 수 없었단다. 긴급지원의 경우도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다고.
그때 백 상담가는 SNS에 아이를 도와달라는 글을 올렸고 하루 만에 수술비와 등록비가 마련됐다. 이후 수술을 잘 받은 학생은 지난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너무 기뻤어요. 이럴 때 저는 에너지가 생겨요.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생각으로 다가선 적은 없어요. 다만 함께 만나며 이야기를 나누고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면서 변화되는 과정에서의 모습에 감사함이 크게 다가오는 것이죠”
지역민과 함께 더불어 성장하는 삶
학교에서 만난 부모들은 백 상담가에게 연락해 부모교육이나 아이들 교육을 해주길 바랐다. 그렇게 2016년 6월, 교육의 필요성을 느낀 6명의 부모들과 함께 부모교육이 시작됐다.
부모들은 아이들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중독, 다양성과 다름에 대한 존중, 정서적인 감정에 대해 교육을 요청했다. 여름과 겨울방학을 활용해 백 상담가의 집은 4년 동안 교육장소가 됐다.
“가장 기본이 되어야하는 것을 살펴보니 가정이었어요. 부모, 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필요해 보였죠. 이후에는 한 어머니가 밴드를 만들어 학부모들을 모아서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을 해왔어요”
밴드를 통해 모인 사람들은 조부모, 남편, 부부, 자녀교육 등으로 강의를 부탁했다. 협의체에서도 다문화, 조손가정 등에 대한 부모교육을 행정복지센터 상담실에서 해오다 어느 때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서 조건 없이 마음을 나누며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떤 날에는 멀리서 그녀를 찾아온 한 사람이 만나자마자 눈물을 쏟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감정이 격해지고 힘든 삶으로 상담하러 오는 이가 있으면 그녀는 1~2시간 금계저수지, 금선정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한다고.
“저는 집에서 가족과 묵상하는 시간을 가져요. 계속 배우며 내게 가르침을 주는 분들과의 교류를 하지요. 그래서 감정에 덜 힘듦이 있어요. 오는 사랑이 있어야 나가는 사랑이 있고 수요와 공급이 없으면 이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올해 초, 백 상담가에게는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 있었다. 2017년 5월 만난 고교1학년 소녀의 변화의 과정을 지켜봐오다 졸업식에 부모를 대신에 참석해 축하를 해줬기 때문이다. 조손가정에서 생활하는 소녀는 심리사회검사와 지적검사에서 지적장애경계선으로 나타나 장애판정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장애판정보다는 정서적인 부분의 치료가 시급함을 느껴 가까이에서 가족처럼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백 상담가를 도와 부모교육에 참여하는 권효진, 김시경 씨가 멘토링에 동참했다. 정기적인 어울림과 도움, 관심으로 소녀는 지적장애가 없는 평범한 소녀로 일상의 행복을 찾아갔다.
백 상담가는 지역사회에서 소외받는 이웃들, 가족생활, 육아로 인한 아픔을 지닌 어머니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부모교육밴드 ‘메타세콰이어’를 통해 부모교육 수업해오고 있다.
“밴드 권효진 총무와 부모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는 언제나 강의를 준비하면서 관련도서를 첨부해요. 교육에 대해 연구하고 충분한 도서를 보고 근거자료를 수집해 전하죠. 모든 것이 내 이야기가 되면 안 되거든요. 의문사항과 질문을 받으며 함께 참여하는 교육을 하고 있어요”
올해도 백 상담가는 부모들의 요청으로 매달 부모교육을 연다. 코로나19가 심각단계가 되기 전인 지난 1월말 열린 후 다음 부모교육은 미뤄진 상태지만 그녀는 여전히 부모들과 소통하며 마음의 치유에 함께하고 있다. 그리고 4명의 다문화가족의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며 좋은 것은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오늘을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