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영주人터뷰[1] 부석면 ‘부석태콩’ 김서임 대표
하루의 시간들이 쌓이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도 더해진다. 우리고장 사람들은 어떠한 삶을 이어왔을까. 평범하게, 때로는 남다르게, 살아온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하려한다.[편집자 주]
고난보다는 성실히 살아왔음에 감사
부석태콩 알리며 삶을 기록해 나가
지난달 9일 상망동에서 부석사가는 방향에 있는 부석면 우곡리의 한 마을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부석태콩’이라는 상호로 청국장 사업을 하고 있는 김서임(70) 대표를 만났다.
이날 몇 명의 이웃들과 코로나19로 미뤄진 마을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왔다는 김 대표는 언제나 푸근하게 반겨줄 것 같은 순박하고 정겨워 보이는 시골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처음 전화를 할 때만 해도 젊고 낭랑한 목소리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목소리가 고우시다고 전하니 “그렇잖아도 외부에서 전화목소리를 듣다가 물품을 사러 오시면 내가 앞에 있는데도 통화한 분을 만나러 왔다고 해요”라며 웃어 보였다.
잠깐의 인사 후 사업장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평범한 주부이자, 농사꾼, 엄마로 살아온 김 대표의 지난 삶과 사업을 시작한 계기 등에 대해 들어봤다.
밤낮으로 일하며 지내온 날들
“지난 이야기를 떠올려도 힘들었다는 것보다 정말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에 오늘 하늘나라에 가도 슬퍼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기도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갈 뿐이에요”
김 대표는 부석면 우곡리가 고향이다. 결혼과 동시에 부산에서 살다가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2급 장애가 있는 친정아버지를 모시며 함께 살았다. 아버지를 보필하며 남매를 낳아 키우던 중 38세가 되던 해에는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김 대표는 가장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혼자서 식구들을 부양해야 했어요. 남편이 아플 때 병원비로 들어간 빚도 있었죠. 그래서 쉴 수가 없어 밤낮으로 많은 일을 했지요.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든든한 마음도 많았어요”
고향으로 돌아온 김 대표는 빚도 갚고 아버지와 자녀들을 돌보며 생활을 해야 했기에 사과적과 시기가 되면 30곳을 다니며 일을 해줬단다. 이외에도 철마다 낮에 할 수 있는 농사일은 마다하지 않고 찾아 일하며 돈을 벌었다고.
“딸이 재능이 많아 피아노, 그림 등을 잘했는데 학원도 보내고 싶었지요. 아들한테도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형편이 좋지 않으니 밤낮으로 일을 해야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고 살림도 살 수 있었어요”
땅이 없었던 김 대표는 마을에 못 쓰는 땅을 홀로 가꿔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가꿔 일군 땅이 40마지기 가량이었다. 낮에는 돈을 벌어야 했기에 자신의 밭에는 밤 9시에서 새벽 1시까지 약을 치며 돌봤다.
“그때 나이가 43~45세쯤이에요. 내가 의지하고 힘을 얻었던 시간은 교회에 새벽기도를 다니며 기도드린 일이었죠. 일을 하다 새벽기도를 가지 못할까봐 중간에 시계를 보러 집에 왔다가고 했지요. 잠은 언제 잤냐고요? 조금씩 틈이 날 때 쪽잠을 잤어요. 그렇게 일하며 아버지를 보살피고 아이들을 키웠어요”
부석태콩 청국장 만들기까지
현재 김 대표는 건강한 밥상으로 오르는 부석태 청국장을 만든다. 열심히 농사지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가 맛 좋고 몸에 좋은 청국장을 특유의 향내 없는 건강함으로 전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해온 것을 봐왔기 때문에 직접 재배한 콩으로 청국장을 만들어 먹었어요. 어머니가 해주던 맛은 아니었지만 맛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요. 그러나 판매하려면 사업자등록은 청국장을 완벽하게 한 후에 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부터 청국장을 만들어 왔던 김 대표는 맛에 대한 것들을 완벽하게 한 후에 사업자등록을 내야겠다는 생각에 지속적인 연구를 해왔다.
청국장 만들기는 직접 농사지은 콩을 삶아 3일정도 띄워 잘 된 것으로 사용했다. 3년에 걸쳐 연습과정을 거치니 어느 정도 친정어머니의 맛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사업을 하면 망할 것 같았다고.
“계속된 연구로 비용도 많이 들었지요. 만든 청국장을 집에서 모두 소비할 수 없어서 맛도 평가받고 싶어 마을 분들과 다니는 교회의 교인들이 드실 수 있도록 반찬으로 전달도 했어요”
그러다 김 대표는 2008년 시청에서 추진하는 계약재배에 참여해 부석태콩 농사를 지었고 다음해 그 씨앗을 종자로 지역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부석태콩으로 청국장을 만들기 시작한 후 2012년이 돼서야 김 대표는 상품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부석태콩’이라는 상호로 상품을 등록했다. 포장용기도 처음에는 비닐포장해 스티커를 붙었다가 시장에서 판매되는 청국장을 여러 개 구입해 연구하고 크기별로 200g 정도의 양을 조정해 상품화를 시켰다.
“우리 청국장을 맛보고 2015년 서울 삿갓 유통회사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처음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그래서 권종기 전 계장님께 회사와 계약할 때 도와달라고 했죠. 정말 고마웠어요. 이후에 다른 곳의 회사에서 계약하자고 연락이 오지만 이 유통회사만 계약을 이어가고 있어요. 지금은 전국에서 택배주문이 들어와 부석태콩 청국장이 판매돼요”
현재의 삶을 기록해 나가다
60대에 들어서서 김 대표는 ‘남은 여생은 무엇을 할까’하고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 있던 것도 글로 적고 힘든 시기를 잘 넘긴 것에 대해 감사함을 담아냈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어려운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힘든 시기마다 하나님이 동행해준다는 마음에 감사했지요. 살면서 행복했어요. 이만큼 살아온 것에 감사의 기도를 드려요”
2010년부터 일상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김 대표는 인터뷰 중에 2010년 12월 10일 기록한 내용을 잠시 읊었다. 그리고 자녀를 혼내야 할 때, 누군가에게 힘을 주어야 할 때 등등 다양한 내용을 기록한 것을 꺼내보였다.
“안동교도소에 있는 사람들이 힘들어 할 때도 편지를 보내고 있어요. 작은 일에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일을 마치고 저녁에는 하루를 생각하며 글을 남겨요”
부석태콩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김 대표는 더 발돋움을 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현재 수도권 소비지 유통센터인 인천 문학구장 바로마켓에서는 부석태콩 청국장이 판매되고 있지만 서울에 판매장을 내서 알리고 싶은 것이 바람이다.
“콩은 영주의 자원이에요. 누군가는 더 잘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날 때마다 청국장을 들고 기관 등에 방문해 알리고 판매해요. 축제에 가서 판매하면 맛을 보고 전화가 와요. 콩과학관에도 갔었고 부석사도 가서 대형버스가 와 있으면 기다리는 동안 홍보를 했어요. 앞으로도 부석태콩을 알리고 마을을 위한 일에도 힘이 낼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하려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