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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호의 문화 확대경[162] 가장 오래된 편액, 부석사의 『無量壽殿』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8.08.03 16:15
  • 호수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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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진 무량수전 편액

유명 건물의 처마 중앙에 높이 걸린 편액(扁額)은 흔히 건물의 얼굴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로부터 당대를 대표하는 명필이나, 고위직 권력가가 직접 쓴 글씨를 판각해서 걸어왔다. 건물을 대표하는 얼굴이니 정성을 들여 가꾸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인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사찰 건물에서부터 편액을 쓰기 시작했다 한다. 그러나 재질이 대부분 목재이다 보니 천년 넘는 세월 동안 전해지는 것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편액은 주로 조선조의 것이 대부분이다. 조선조의 편액은 크게 유행한 탓에 그 종류나 서체가 매우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별도로 하나의 장르를 형성했다고나 할까? 그런 멋있는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들을 국가문화재로 대접하는데 비하면 편액은 그야말로 홀대를 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어느 것일까. 현존하는 사찰 편액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의 글씨는 신라 명필 김생의 필적으로 알려진 공주 마곡사 ‘大雄寶殿(대웅보전)’이다. 하지만 그의 친필이 1300년 넘도록 남아 있었다기보다는 모방이나 집자(集字)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렇지만 이 편액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편액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자료라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부석사의 『無量壽殿(무량수전)』은 고려 공민왕이 직접 쓴 어필(御筆)이다. 홍건적의 침략으로 순흥, 안동에 몽진(蒙塵)해 있을 당시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금의 어필은 낙관이 하지 않고 황색의 금자(金字)를 쓰는 것이 관례이다. 이에 따라 무량수전 편액에도 낙관은 없으나, 자세히 보면 어필을 상징하는 금자 흔적은 남아있다. 또한 후면에 이를 뒷받침할 기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의 개성 환궁이 1363년 무렵이니, 이 편액은 적어도 약 650여 년간 한 곳에 걸려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가장 오래된 무량수전 건물과 함께 국내 사찰 편액 중 가장 오래된 편액으로의 인증은 당연한 절차가 된다. 또한, 무량수전 편액은 드물게 세로쓰기를 하고 있다. 중국 원나라 방식이라고 한다. 공민왕이 어린 시절 원나라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량수전 편액의 가치는 탁월해 보인다.

조선조 세조의 친필 편액은 공주 마곡사 영산전에 있다. ‘靈山殿(영산전)’ 편액에는 세조대왕어필(世祖大王御筆)이라는 기록이 있다 한다. 마곡사에 도피한 김시습을 만나러 왔다가 이 편액을 썼다고 전해진다. 고양의 흥국사에는 영조의 ‘藥師殿(약사전)’ 편액이 있고, 해남 대흥사의 ‘表忠祠(표충사)’ 편액은 정조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선대원군의 글씨 편액도 상당수 남아있다. 통도사 일주문의 ‘靈鷲山通度寺(영축산통도사)’, 대웅전 법당 외부에 걸려 있는 ‘金剛戒壇(금강계단)’, ‘大方廣殿(대방광전)’, ‘圓通所(원통소)’ 편액이 모두 대원군이 쓴 것이다. 또한 화엄사 탑전에 있는 작은 편액 ‘世尊舍利塔(세존사리탑)’, 서울 삼각산 흥천사의 ‘興天寺’, 삼각산 화계사의 ‘華溪寺’ 등의 편액도 대원군 글씨이다.

특별한 인연을 갖고 편액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이순신이 쓴 여수 흥국사 봉황루 안쪽의 ‘拱北樓(공북루)’ 편액은 자신이 흥국사 승려 약 3백 명을 거느리고 왜적과 싸우다가 많은 전몰자가 생긴 것을 애통하게 여겨 봉황루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사죄의 절을 올린 다음 이 편액을 썼다고 전해진다. 추사 김정희의 편액도 적지 않은데, 대표적인 것이 서울 봉은사 경판전에 걸린 ‘版殿(판전)’이다. 이 편액은 그가 죽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천 은해사 ‘大雄殿(대운전)’ 편액도 추사 글씨이다.

승려가 직접 쓴 현판(懸板)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부석사의 ‘浮石寺安養樓重創記(부석사안양루중창기)’라는 초서 현판이다. 너무 낡아 모두 판독하기는 힘든 상황이나, 끝 부분에 ‘四溟狂漢記(사명광한기)’라고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명당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 남양주 봉선사 운허 스님은 1970년 법당을 재건하고 ‘큰법당’이라는 한글 편액을 내걸어 이 부문 최초의 편액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사찰 편액의 유구한 역사에 비해, 이에 대한 예우는 여전히 소홀하기만 하다는 게 시중의 중론이다. 국내 최고의 편액 『無量壽殿』 등이 충분한 국가문화재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회자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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