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일간의 생생한 피난기록..."처참한 피난생활 말로 다 못해요"
순 한문으로 씌여진 남하일기는 14년 전에 88세의 나이로 사망한 권병호씨<전쟁 당시 이산면의회 의장)가 전쟁 중에 피난을 떠나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63일간의 처참한 생활을 기록한 것으로 하망 1동에 사는 맏며느리 김계순 할머니(78.하망1동)가 그동안 보관해 오다 최근 본지에 이를 공개했다.
김 할머니는 "시아버지의 몇 안되는 유품으로 보관해 왔다"며 "죽기 전에 현대문으로 해석이라도 해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도리인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일기에는 피난을 떠나면서 겪었던 고 권병호씨 가족의 피난생활을 일자별로 일목요연하게 그 당시 날씨까지 상세히 기록하면서 정리했다.
김 할머니는 "전쟁 당시 시아버지를 비롯한 남편과 시동생 모두 공직에 몸담아 온 관계로 열두식구가 한꺼번에 피난을 떠나게 됐다"며 당시 일을 끄집어 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이 일기를 쓴 고 권병호씨는 한학에 밝아 일제시대 이산면사무소에 재직하다가 해방 후 실시된 민선의회 이산면의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며느리 김 할머니는 시아버지 권병호씨에 대해 "평소 일상생활에서 종이에다 여러 글들을 쓸 정도로 습작을 많이 한 분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남하일기'는 부산에 사는 권 씨의 손녀가 현대식 우리말로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다음은 고 권병호씨의 며느리 김계삼 할머니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임신 3개월 된 몸으로 시작된 피난생활"
"당시 저는 임신 3개월인데다 금방 젖을 땐 아이를 들쳐업고 옷가지 보따리와 간단한 살림를 이고 들고 피난을 떠났죠"
김 할머니는 스물여덟의 나이에 그렇게 피난을 떠날 때만 해도 1주일이면 집으로 다시 돌아 올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다 어디쯤에서 기차를 탄 것이 피난 인파 속에 묻혀 경주까지 내려가게 됐고 그곳에서 하루하루 아침이슬이라도 피할 수 있는 헛간이라도 구해 숙식을 할수 있으면 다행인 피난생활이 두달 동안이나 계속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단다.
더군다나 함께 떠난 열두가족 세식구가 그곳 경주에서 뿔뿔이 헤어지는 아픔도 견뎌야 했다.
"다리 밑에서 자갈을 고르고 일주일을 지낸 적도 있지요. 그나마 그런 장소도 없으면 아무데서나 솥을 걸고 밥을 해먹고 그냥 자는 생활이었습니다."
피난을 떠날 당시 마침 전쟁이 터지기 전에 사 둔 집값 치룰 잔금이 남아 있어 피난생활 초기에는 끼니라도 제때 해결할 수 있었지만 피난생활이 후반기에 접어 들면서는 이마저 다 떨어져 남의 집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오는 동냥을 다니기도 했단다.
"어떤 집은 인심이 후해서 밥 한 공기를 주지만 어떤 집은 말 그대로 한 숟가락 떠주는 집도 있었죠. 그땐 정말 비참하죠"
그나마 그렇게 얻어 온 밥도 피난 와중에 찾아오는 손님이라도 있으면 자신이 먹을 밥 한 알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어 당시 피난 생활의 서글픔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단다.
김 할머니는 "당시 면사무소에 가면 피난증을 만들어 식량을 배급 받을 수 있었지만 양이 너무 적어 항상 배고픔을 안고 지내면서도 내색 한번 해보지 못한 채 며느리 노릇까지 해야 했다"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은 그 당시 피난 생활을 말로 해도 잘 몰라요. 세월이 흘러 흘러 벌써 반세기가 지나버려 옛날 이야기쯤으로 치부해 버리죠"
두달간의 피난생활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남기고 떠났던 살림살이는 모두 도둑을 맞았고 달랑 가구 몇개만이 뼈대만 남아 집을 지키고 있더라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일흔 여덟의 김 할머니는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이 터진 시대에 태어나서 일제에 온갖 핍박을 다 받고 해방된 후에는 좌우익의 대결로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6.25때는 피난을 떠나 처참한 생활을 해야 했던 세대이다.
특히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 나라를 경제부국으로 만든 세대도 바로 그들 세대인 셈이다.
"안 먹고 안 쓰고 열심히 일만해서 살기좋은 나라 만들어 놨더니 요즘 왜 이렇게 도둑님(?)들이 많이 설치는지....다 늙은 노인이 뭘 알기나 아냐고 하면 할 말 없지만 요즘 TV에 맨날 그얘기뿐이더라구요"라고 말하는 김 할머니의 마지막 말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함께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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